디아스포라 기행 ディアスボラ紀行-追放された者のまなざし (2005)
서경식 (지은이) | 김혜신 (옮긴이) | 돌베개 | 2006-01-16
"‘나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나서는 사람만이 재일조선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늘 자신은 누구인가 자문하는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이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온갖 식민주의적 관계를 고려하면 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포함한 전체야말로 재일조선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128쪽)
1992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을 때 너무 슬프고 마음 아프고 두렵고 충격적이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로운 떠돌이가 이번엔 세계화 시대의 제1 화두가 된 ‘디아스포라’라는 담론으로 무장을 하고 나타나서, 더 근사하고 다소 스타일리시하게 떠돌이의 아픔을 전한다.
책에는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란 부제가 붙어있는데, 책의 포맷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비슷하다. 떠돌이(이 책에서는 ‘디아스포라’)가 한국 일본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떠돌이의 눈에 비친 미술을 논하는 것. 달라진 것이 있다면 20세기 중후반 한반도의 현실(북에는 수령국가, 남에는 독재국가) 때문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아픔을 겪은 청년의 넋두리 같았던 전작이 21세기에 와서 ‘디아스포라’라는 프레임을 얻었다는 것, 15년 전 ‘서양미술순례’의 저자가 어깨 늘어지고 창백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다면 ‘디아스포라 기행’의 저자는 나름대로 이름을 얻어 일본의 방송사가 다큐멘터리 기행을 맡길 정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명사(名士)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난다는 것.
서경식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세상도 시대도 상전벽해가 되어 광주에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지경이 되었으니, 저런 변화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리고 15년 세월 동안 독자인 나도 변했다. ‘서양미술순례’ 때에 캄뷰세스왕의 재판 그림과 옆구리 뚫린 예수상 앞에서 시큰한 감정으로 상처를 달래고 있던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서경식의 글은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이 사람은 상처 입은 그림들, 상처 입은 조각들만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특유의(서경식 특유의, 라기보다는 일본어 특유의) 잔잔하게 흘러가는 문체를 따라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자니 15년 전과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아프고, 15년 전과 다른 맥락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좋은 책에 굳이 트집을 잡는 것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내 눈에는 서경식도 역시나 ‘주류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한국과 일본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유럽기행’이다. 왜 아우슈비츠를 자꾸만 떠올리나요, 라고 물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디아스포라라 부르는 사람과 유대인의 연결은 1차원적으로 보일 정도로 직접적인 연결 아닌가. 요는,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은 유럽적이고 유대적이라는 얘기다.
여전히 고상한 디아스포라의 눈에는 잘츠부르크와 츠바이크가 보일 뿐,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앞부분에 잠시 책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나 인도네시아 난민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그들에겐 미술관에 전시돼 있을만한 ‘고상’하고 ‘유명’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고, 일본 방송들이 돈 써가며 서경식같은 내레이터를 데리고 취재를 다닐만한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눈이 꼬인 걸까? 꼬였다면 꼬인 것 맞다. 15년 전엔 유대인 학살당한 얘기만 해도 불쌍하고 인간 세상이 처참해 보이고 했는데, 지금은 눈이 꼬여서 유대인 학살 얘기 들으면 “자기들도 당해봤다며 팔레스타인에서 남들 학살하니 이스라엘도 참”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나는 눈도 꼬이고 귀도 꼬여서, 재일조선인 문제와 코리안 디아스포라 얘기에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누가 잘츠부르크 유대인 이런 얘기하면 “아랍 얘기는 왜 빼놔” 하면서 거슬려한다. 그래서 서경식의 글도 마음이 불편했다.
“부모가 모두 나이지리아인인 잉카 쇼니바레는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런던과 라고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 우리는 대부분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것이 쇼니바레의 작품에 되풀이해 나타나는 테마다. 이런 천의 색과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기원한 납염이 그 종주국인 네덜란드를 거쳐 유럽으로 유입되고 맨체스터에서 영국인이 디자인한 것이 다시 아프리카로 수출된 것이라고 한다. 원재료인 면화는 인도산이거나 동아프리카산이다. 곧 우리들이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는 색과 무늬의 이미지는 사실 근대 식민지배의 과정에서 종주국에서 생산된 뒤 식민지에 강요돼온 것이다.” (158쪽)
책에 잉카 쇼니바레 ‘정사와 간통’ 사진이 나와 있는데 ‘그 천의 선명한 색깔과 무늬를 보고 의심 없이 아프리카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그런 작품은 아니다. 아프리카를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아프리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프리카 것인가 보다 착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잉카 쇼니바레의 다른 작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는데, 짐작대로 내 눈에는 아프리카적임을 가장하여 서구의 침범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작품들에 가까워 보였다.)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얘기하려면 아프리카에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꼬인 눈으로 보아 그런 것일까. 어쨌든 책은 우리가 읽어야 할, 알아야 할, 관심 가져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고 좋은 책인데 그냥 내 마음이 좀 꼬여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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