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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판매학- 약이 병을 낳고 병이 돈을 낳는다

딸기21 2007. 3. 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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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판매학 Selling Sickness (2005)

레이 모이니헌 | 앨런 커셀스 (지은이) | 홍혜걸 (옮긴이) | 알마 | 2006-11-07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회사에서 부장과 트러블이 있어 신경질이 많이 났다고 하길래 사회불안장애를 줄여주기 위해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서 나온 항우울증·불안장애 치료제 ‘팍실’을 갖다줬다. 하필이면 나도 생리 전이라 기분이 좋지 않고 나돌아 다니기도 싫다. 그나마 2주 전에 미리 미국 엘리릴리에서 나온 월경 전 불쾌장애 치료제인 ‘사라펨’을 먹었더니 이번 달엔 예전보다 우울증이 좀 덜한 것 같기도 하다. 딸아이는 또 숙제를 안 해 간 모양이다. TV 시사프로그램을 보니 요즘 주의력 결핍장애가 많다던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고 약도 받아와야겠다. 내일은 여동생이 친정엄마 모시고 병원에 가서 골밀도 검사를 하고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제)도 받아온다고 하니, 같이 가볼까.” 


물론 내가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나는 약이나 병원이라면 좀 극단적으로 싫어해서(그노무 장염만 아니면 정말 건강할 수 있었는데;;) 진짜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지 않았었다. 작년 재작년 장염 때문에 병원에 몇 번 갔는데, 해열제 진통제 많이 맞았더니 금세 몸에 내성이 생겨 안 듣게 돼버렸다. 마지막에 병원에 갔을 땐 너무 몸살이 심해서 응급실로 갔는데 해열제 주사를 맞아도 열이 내리지를 않았다. 문득 경각심을 느끼고 ‘다음엔 아프면 그냥 집에서 앓아야지’ 하는 고운 마음을 먹었다. 


저기 우스꽝스러운 스토리는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내가 장난을 해본 것인데, 사실 요새 약 광고, 약 의존증, 약 중독 장난 아니게 퍼져있는 것 같다. 얼굴에 뾰루지만 나도 소염제 항생제 사다 먹고, 열이 1도만 올라가면 병원행, 배탈 나면 화장실 가서 고생 좀 하면 되는데 배탈약 먹고, 심지어 배탈이 나지 않았는데도 좀 많이 먹었다 싶으면 소화제를 미리 먹어두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배탈 몇 번 나거나 속 좀 더부룩하면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네 만성 소화불량이네 하면서 약으로 위장을 도배를 하고. 

이런 경우가 워낙 많은데 “약은 되도록 안 먹는게 좋아요” 하면 “넌 안 아파봐서 몰라, 니가 아파봐라” “왜 약을 안 먹이고 애를 잡으려 그래” 이런 식으로 되어버린다. 실은 이렇게 말하는 나도 회사 다니면서 몸 아플때 ‘푹 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는 안 되니깐 한번 아프면 약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어찌 다른 방법을 찾을 도리가 없다. 


알라딘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어서 책을 받았는데 그동안 다른 책들에 밀려서 읽지 못하다가 주말에 몰아쳐 읽어버렸다. 표지의 느낌에 비해선 제법 빨리 읽힌다. 문장은 좀 범벅이지만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저자들은 우리 귀에 익숙한, 혹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많이 들려오는 10가지 ‘병 아닌 병’들이 사회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마케팅에 어떻게 세상이 놀아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콜레스테롤. 내 친정엄마는 혈압이 좀 낮으시고, 평생 식성이 까다로우셔서 돼지고기 닭고기 종류는 입에도 안 대셨다. 쇠고기도 기름기 없는 살코기만 어쩌다 한번 드실 뿐 즐기지 않으셨는데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판정을 받으셨다. “원래가 채식을 하니 식이요법 같은 것도 안 통하고, 대체 내가 왜 콜레스테롤치가 높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저자들의 말에 따르면 콜레스테롤이 높은 것은 병이 아니다. 다만 콜레스테롤이 높고 운동도 안 하고 술담배 피우고 하면 심장마비나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남보다 더 높다는 것, 그 정도다. 그런데 의사들은 나이든 이들이 병원에 오면 으레 콜레스테롤 검사를 하고 “좀 높네요” 하면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약을 내준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약장수들 맘대로 될 리만은 없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제약회사들 돈으로 신약 기능을 테스트하고, 유명하다는 의사들은 제약회사들 돈으로 학회를 열고 여행을 다닌다. 제약회사들은 의사들을 내세운 ‘전문가 의견’과 그걸 베껴 쓰는 언론 보도, 스타 마케팅과 ‘환자 옹호단체’들을 앞세운 캠페인들, FDA에 대한 집요한 ‘공작’ 수준의 설득을 거쳐 콜레스테롤이라는 단일 징후를 ‘질병의 전단계’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정상 수치’의 기준을 자꾸자꾸 좁혀서 특정 연령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환자’로 만들어 겁주고 약을 파는 것이다. 저자들은 병이 아닌 것을 병으로 만드는 이런 과정을 ‘질병의 의학화(Medicalising)’라 부른다. 


저자들이 지적한 제약회사들의 10가지 대표적인 ‘왜곡술’은 이런 것들이다. 


1. 고콜레스테롤-심장마비와 돌연사의 주범으로 몰아붙여라 

2. 고혈압-정상 범위를 좁혀라

3. 골다공증-젊은 여성을 새로운 위험군에 포함시켜라

4. 과민성 대장증후군-약물 치료가 필요한 정식 질환임을 강조하라

5. 우울증-마음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시켜라

6. 월경 전 불쾌장애-모든 여성을 잠재적 고객으로 만들어라

7. 폐경-정상적인 노화과정도 질병이라고 믿게 하라

8. 사회불안 장애-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질병을 브랜드화하라

9. 주의력 결핍장애-환자와 그 가족들을 통해 병을 홍보하라

10. 여성 성기능 장애-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라


저자 중 레이 모이니헌은 호주방송 의학전문기자, 앨런 커셀스는 캐나다 빅토리아대에서 의학정책을 전공했고 의학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사람이라 한다. 이 책을 국내에 번역한 이는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였던 홍혜걸씨다. 


역자는 옮긴이 머리말에서 자기도 신문사에 있는 동안 다국적 제약회사들 돈으로 외국에 다녔고 후원사의 제품이 돋보이게 기사를 썼었다고 고백하는데, 고백치고는 너무 당당하달까, 뻔뻔하달까. 물론 뒤에 “그들의 지원을 이유로 팩트를 벗어난 기사를 쓴 것은 아니었다”는 꼬리를 달긴 했지만 말이다. 역자는 의학계 사람으로서 책의 내용에 공감을 표하는 동시에 ‘불편함’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우스우면서도 어찌나 ‘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나는 제약회사한테서 사탕 한 개 얻어먹은 적 없지만, 그리고 과학이나 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어쩌다보니 가끔씩 외국 의학연구 결과나 약 문제 같은 것들을 쓰게 된다. 물론 내가 쓰는 글들의 초점은 업무 특성상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나의 ‘무식함’ 때문에 약이나 수술 같은 것을 칭송한 적이 없지 않았다.


요사이 TV에서 어린이 주의력결핍장애, 과잉행동장애 같은 것을 자꾸만 방송해주는데 이것 또한 ‘신종 질병’ 같은 느낌이 들어 어딘지 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뇌과학 분야에 대해선 이 책의 주장과는 좀 다른 것들을 미리 읽어서 그런지 전적으로 동감이오, 할 수는 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약 의존증에 본의 아니게 걸려버린 사람들에겐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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