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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세계- 아인슈타인의 베일

딸기21 2007. 1. 24.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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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베일Einsteins Schleier (2004)

안톤 차일링거 (지은이) | 전대호 (옮긴이) | 승산 | 2007-01-18



약 200년 전에 영국의 영(Young)이라는 과학자는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개의 좁은 틈으로 빛을 비추어 물결무늬 그림자를 보여주는 ‘이중 슬릿(틈새)’ 실험을 생각해냈다. 이중슬릿은 과학책을 한두 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현대물리학에서 빠지지 않는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중슬릿 실험을 여러 용도에 응용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빛은 입자(광자·光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언제 입자가 되고 언제 파동이 되는 것일까? 우습게도 빛은, 이중슬릿을 관찰하는 내가 광자의 위치를 알고 있을 땐 입자처럼 행동하고, 모르고 있을 땐 파동처럼 행동한다! 놀랍지 않은가? 빛이 내가 지켜보는 것을 어떻게 알고 내 눈길에 따라 행동방식을 바꾼단 말인가. 


과학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듣기에 따라선 좀 잔인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어디까지나 생각과 논리만으로 이뤄지는 사고실험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상자 안에 고양이를 가두고 스위치를 눌러, 상자 속 방사능 폭발장치를 가동시킨다. 스위치를 누른 순간 폭발이 일어날 확률은 50%. 스위치를 누르고 5분 뒤에 당신은 상자 뚜껑을 연다.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있을까?


고양이의 운명은 5분 전에 결정됐지만, 당신이 뚜껑을 열 때까지 5분 동안 고양이의 생명은 ‘결정돼 있지 않다’. 과학자들은 고양이의 생사를 ‘파동함수’로 표현을 한다. 그들의 어법을 빌자면 5분 동안 파동함수는 ‘중첩’돼 있는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고양이는 ‘살면서 또한 죽어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생명을 가르는 파동함수는 당신이 상자를 여는 순간에야 비로소 고정되는 것이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양자물리학자들 버전으로 바꾸면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실재(實在)가 되었다”가 된다. 


그저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살고도 죽었다니, 내가 쳐다보는 순간 정체를 바꾸는 빛이라니. 내가 가진 정보가 물질세계를 규정한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유아론(唯我論)이 아닌 셈이다. 정보가 실재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소리다.


때로 현대물리학은 직관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의 베일 뒤에 가려진 양자의 세상은 우리의 직관, 상식을 완전히 던져버리기 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공간이다. 


안톤 차일링거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일하는 유명한 물리학자다. 비엔나대학 실험물리학연구소는 현대물리학의 선조 격인 루드비히 볼츠만과 에른스트 마흐, 앞서 말한 고양이의 냉정한 주인 슈뢰딩거가 여기에서 연구를 했다. 차일링거 박사의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공상과학소설의 단골 소재인 순간이동이 가능함을 입증해보였다. 방법은, 여기 있는 양자의 ‘정보’를 저리로 옮겨 일종의 재생을 하는 것이다.


차일링거는 우리가 가진 세상을 정보가 결정한다는 주장을 넘어, 정보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 단위로는 비트(bit)를 개량(?)한 ‘큐비트(qubit)’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 이 입자는 내가 측정하기 전에는 여기 있지 않았다. 여기 이 고양이는 내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정보가 곧 세계이다. 고대인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에테르(ether)라는 물질이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자기장, 전기장 같은 장(場)들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고 말한다. 차일링거는 에테르와 장을 ‘정보’로 바꾸었다.


‘정보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빛이나 전기, 자기, 에너지처럼 지금은 잘 알려진 것들도 예전엔 미지의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런 개념들이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서 과학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몇 백 년 동안의 일이다. 비트, 디지털 같은 말들이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 년 간의 일일 뿐이다. 

양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뉴턴적(的) 공간’의 물리학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 작고 미묘한 세계에서 실재성(實在性)이나 객관성은 너무나 취약한 개념들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후 물질세계에서 절대적인 것, 객관적인 것은 사라져버렸다. 양자들의 세계는 측정불가능하며, 확률적인 정의만이 가능한 세계다. 그곳은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 세상의 천재과학자들마저 아연케 만드는 당혹스러운 공간이다. 관측자가 가진 ‘정보’가 관측 대상과 피드백을 해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양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차일링거의 ‘정보’가 세상의 구성요소로 격상될 순간이 오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재미있다. 원래 양자역학은 어려운 법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도, 리처드 파인만도 양자역학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책에서 차일링거는 양자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차일링거가 보여주는 탁월함은 어려운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들과 ‘정보 물리학’에 대한 통찰력을 넘어서, 철학적 질문들로 향해갔을 때 빛을 발한다. 정보가 실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스무고개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 등을 통해 보여준 뒤, 차일링거는 과학과 철학의 전면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정보는 물질세계의 근본이다’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세계관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책의 후반부는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철학적 질문들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할애돼 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아직 불분명하고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실재와 정보를 포괄하는 개념의 본성에 대한 질문, 즉 앎의 본질에 대한 질문도 그런 질문들 중 하나이다.”


양자물리학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은 것을 보면 차일링거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작가적 역량 또한 탁월한 사람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출간된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 (Information - The Language of Science. 승산)는 미국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가 차일링거의 연구와 아이디어에 감복해 내놓은 ‘정보 물리학 소개서’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아인슈타인의 베일’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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