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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딸기21 2006. 10. 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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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Banker to the Poor

무하마드 유누스 | 알란 졸리스 (지은이) | 정재곤 (옮긴이) | 세상사람들의책




내 눈에 경제학 교실은, 영화가 끝날 무렵엔 주인공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영화관처럼 한가롭기 그지없는 장소로 비쳤다.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경제학 문제는 우아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내 눈앞에는 가혹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조브라 마을은 내가 다닐 대학이고, 조브라 주민들은 나를 가르칠 교수들이 될 터였다. 나는 ‘땅 속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작정했다. 현실을 보다 가까이서 보면 더욱 더 잘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치 땅벌레처럼, 길을 가다 장애를 만나면 장애를 둘러감으로써 결국 목표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나는 여러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근심이 누그러졌다.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는 다시 힘을 냈다. 마침내 조브라 마을을 찾았을 때, 나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았다. 나의 앞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보였다. (23~25쪽) 


사회복지 전문가들이나 공동체 지도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본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나 의료지원, 직업 훈련, 교육, 주택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제도적 도움이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나는 이런 반대 의견들이 선량한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8년 동안 이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우리가 표명하는 소신이야말로 결코 그른 것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사회적 지원보다도 융자가 더욱 더 절실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283쪽) 


시장경제와 대량생산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개인에게 소액 융자를 제공함으로써 보잘것 없는 자립형 경제활동이나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해봐야 거시적으론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가난을 퇴치하려면 단순히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보다는, 포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일 자체보다는 일과 연관된 자본에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미미한 여유 자본만 있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96쪽) 


나는 2050년이 되면 전세계가 마침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가 되면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였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전세계적으로 가난이란 사실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도한 가난이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까닭은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가난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방책으로 우리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더 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따름이다. (319쪽) 


그 어떤 경제학자도 자립형 노동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보는 세계의 모습이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성년기에 이르러 열심히 일함으로써 고용주의 눈에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의 전초 단계로 파악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들이 그리고 있듯이, 젊은이가 고용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한마디로 역겨움을 느낀다. 내가 어릴 적 우리의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시집 잘 가려면 곱게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과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고귀한 것이어서 취업시장에 나가기 위해, 또는 일생을 고용주를 위해 바치느라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325쪽) 


나는 경제학을 통해서 돈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돈을 융자해 주고, 또 이 융자를 통해서 우리가 거두고 있는 성공이 바로 회원들의 손에 쥐어진 구겨진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돈을 매개로, 돈으로써 이루어지는 우리의 소액 융자는 사실상 돈과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소액융자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액 융자는 우리 인간이 가진 꿈을 일깨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성과 존중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고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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