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미국시대의 종말

딸기21 2006. 10. 2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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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시대의 종말 The End of the American Era (2002)

찰스 A. 쿱찬 (지은이) | 황지현 (옮긴이) | 김영사| 2005-04-15



요새 국제관계 책들 보는 중에 ‘이론’에 대한 부분이 많아서 좀 지겨웠다.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국제문제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종류가 있다면 아무래도 ‘현장’을 생생하게 다룬 것들, 내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면서 읽는 재미도 있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무슨무슨 주의니 이론이니 하는 것들은 미국이나 유럽인이나 아니면 서구화된 것 좋아하는 한국의 교수·학생들은 좋아하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쓰이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짜증나고 싫은데 이 책은 앞부분- 거의 3분의2 정도가 짜증나고 싫은 것들이었다. 


저자는 너무나도 아메리칸스럽게도, 파워를 잃어가는 착한 미국을 염려하는데 그 염려의 양상이 참 가증스러웠다. 이런 종류의 책들 중에 김영사에서 나온 것들은 거개 그러하지만 이 책도 역시나 왜 읽어야할지 의심스러운 것들 중 하나였다(그냥 있으니깐 읽기 시작한 거였고 기대도 별로 안 했지만). 


그런데! 무려 360쪽 정도 넘긴 후에 갑자기 책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앞부분에서 저자는 지면을 쓸데없이 많이 할애해 건국 이래 미국의 역사와 외교적 고립주의를 강조하면서 미국 헤게모니 약화를 주장한다. 어떤 부분에선 이상주의에 가깝고, 미국 예찬에선 현실주의를 내건 보수파들 꼴통 주장에 가깝다. 소프트파워의 몰락? 저자는 한단계 더 나아가, 소프트 하드 안 가리고 암튼 미국의 시대가 끝날 처지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조지프 나이가 됐건 폴 케네디가 됐건 로버트 카플란이 됐건 미국 논자들이란 하나같이 ‘미국 망해가자나 큰일이야 안돼!’ 하는데 쿱찬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미국 망해가자나, 큰일이야, 이렇게 가면 안돼! 로마제국이 동로마 서로마 나뉘어 쌈박질하다가 망했는데 미국은 그러면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중국 무섭다 아시아가 뜬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당분간’(적어도 앞으로 수십년 동안) 미국의 경쟁자는 유럽뿐이다, 통합된 유럽을 우습게 보지마라. 방법은 유럽에 파워를 자리를 내주는 거다! 태양은 영원할 것이라며 철모르고 방방 뜬 미국인들이여, 파워를 지키는 방법은 역설적이지만 평화롭게 파워를 내주고, 그럼으로써 ‘지는 대신 나눠 갖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입장은 다시 바뀌게 되어있다. 유럽은 통합되고 빠른 시일 내에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미국이 물러나야 한다. 미합중국은 과거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벌였던 권력과 영향력의 이동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과거의) 권력 이동이 평화롭게 진행된 이유는 영국이 미국에 대해 전략적 억제를 실행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종말이 영국과 미국의 평화적인 권력 이동처럼 진행될 것인지, 아니면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과 같이 피로 얼룩질 것인지는 미국의 행동에 달려 있다. 1800년대 영국이 그랬듯이 미국이 이번에는 패권을 가지고 카드를 낼 차례이다.”(366~367쪽)


영국이 미국에 기꺼이, 현명하게 ‘패권국 자리를 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략적 억제(strategic restraint)’라는 개념은 눈에 띈다. “전략적 억제의 실행이란 힘을 억제하고 양보하며, 다른 국가에도 활동의 여지를 주는 것이다.” 뒷줄에 “어떤 상황에서든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전략이다, 상대하기 곤란한 적에 대한 억제 행위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 있으며 오히려 역이용당하기도 한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적어도 유럽을 배신자 후보에 올려놓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와 터키가 친해지도록 도울 것, 터키를 유럽시장과 제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통합할 것(아쉽게도 유럽은 거부하고 있고 터키에서마저 반감이 커지고 있지만)

▲러시아를 남 보듯 하지 말고 유럽으로 끌어들이고 나토(NATO)에도 가입시킬 것(이 경우 나토의 성격 자체가 동반 변화해야 한다) 

▲중국을 무조건 적대하며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사안들을 분류할 것, 중국에 ‘안 미워한다’ 메시지를 전해줄 것 

▲동아시아의 화합을 위해 일본의 과거사 책임을 명확히 비판할 것 

▲전쟁할 생각 말고 테러 막기 위해 개도국 지원부터 늘릴 것 

▲중동 친미국가들의 독재·빈곤 등 정치적 실패에 책임을 물을 것, 이라크를 빨리 이라크인들에게 돌려줄 것 

▲국제기구를 멸시하지 말고 강화하고 다자간 대화채널을 만들 것. 


앞부분 적잖이 꼴사나운 우익적 진단들과 달리 저자가 내놓는 추천사항들은 그야말로 추천할만한 것들이다. 이 사람이 보기에도 부시가 하는 짓이 심하긴 심한 모양이다. 브레진스키, 키신저 같은 미국 ‘정통 보수’들이 부시네 하는 짓을 보면서 비판한 것과 어떤 면에선 맥락이 비슷하고 어떤 면에선 좀 다르다. 쿱찬은 좌와 우,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보수와 진보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미국 칭찬은 다소 우습고 극히 현실적인(‘현실주의적인’ 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문자 그대로 현실적인) 제안들은 들을 만하다.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 이런 류의 제안을 들을 것인가 하는 점일 터인데, 이거야말로 세계 60억 인구의 고민 아닌가.


“미국은 지배력의 보존보다는 평화의 유지가 주요 관심사라는 메시지를 다른 국가에 보내서 자신들의 우호적인 의도를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365쪽) 


그런데 과연 미국의 의도는 세계 모든 잠재적 라이벌들에게 ‘우호적’인가? 미국의 주요 관심사는 지배력의 보존이 아닌 평화의 유지에 있나? 실제로 미국이 필요할 때가 많다. 속으로야 무슨 꿍꿍이가 있건 미국의 ‘선한 행동’에 기대야 할 일은 많다. 미국이 나쁜 짓 많이 하지만 미국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래저래 미국은 고민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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