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지은이) | 정영목 (옮긴이) | 민음사
항상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못 읽는 책들이 있다. 굳이 따지자면 내 경우는 조지 오웰의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존 리드의 ‘세상을 바꾼 열흘’ 같은 책들이다.
이제는 읽으리라 하면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를 산 것이 벌써 2년 전이다. 읽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부터 치면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고, 그 긴 시간동안 왜 안 읽고 동경하면서 또한 피하면서 지나쳐왔는지 그 이유도 기억이 안 난다.
올해(정확히는 지난달 19일)가 스페인 내전 70주년이라고 해서 유럽 언론들이 크게 다루고 국내 신문들도 몇몇 곳에서 집중보도를 해서 이번에야말로 읽어 ‘치우자’ 마음먹었는데, 읽고 나니 내가 그동안 조지 오웰을 너무 무서워했던 것 같다. ‘1984년’과 ‘동물농장’, 어릴적 반공도서급으로 포장돼 권장도서 목록에 늘상 올랐던 이 두 권의 책 말고는 읽은 것이 없지만 그 두 책이 준 인상이 너무나 강력하여 거의 트라우마처럼 머리 속에 새겨져 있다(그 책을 읽은 뒤 나는 ‘저렇게 강력한 무언가(빅브라더)에 대항하는 것은 나처럼 나약한 사람한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일거야’하고 미리부터 자포자기했고 실제로 그런 인간이 되었다). 둘 더하기 둘은 셋도 되고 다섯도 되는 거야, 하는 1984년의 그 얘기가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그 무엇으로 언제나 떠올려지고 암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이 작가였다.
그런 면에서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재발견. 뭐, 잘 모르고 있었으니 재발견이랄 것도 없지만 아무튼 오웰의 솔직 담백 명료하면서 일부러 순진무구하게, 또 어떤 부분에서는 기쁨과 분노가 새록새록 묻어나게 쓴 참전기를 보니 재미있었다.
두 번째는 스페인 내전의 발견. 이건 그야말로 내겐 ‘발견’이다. 게르니카가 어쩌고 프랑코가 어쩌고 말만 들어봤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혁명전쟁의 생생한(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오히려 생생한) 묘사를 보니 뒤늦게 흥미진진, 조금은 가슴이 뛰었다. 특히 오웰이 공들여 묘사한 혁명기 스페인의 동지애 같은 것들, 역시나 지금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큼은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아무리 욕했을지라도, 나중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어떤 것과 접해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140쪽)
프랑코 독재를 예감하면서도 잡을 수 없는 꿈을 미리 맛보는 듯 동지애를 확인하며 순간순간 기뻐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덩달아 내게도 기쁨을 주고, 애틋함과 서글픔을 안겨준다.
역자 설명에 보면 오웰 본인의 후일담을 인용해서 민음사 번역본 11장에 해당되는 통일노동자당을 위한 변명 부분을 뺄까 말까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 뺐으면 아주 아쉬웠을 뻔 했다. 영화 ‘랜드 앤드 프리덤’의 그 토론장면들처럼 이 책에서도 가장 재미난 부분 중 하나가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얘기에서 정치적인 부분을 빼버리면 재미가 없지. 공산당이 왜 부르주아를 편들어? 공산당이 왜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탄압해? 왜 정치공작 뻔하디 뻔한 음모로 우리 편을 파시스트 편으로 몰아붙여? 사실은 스탈린주의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면서 결국 파시스트 좋은 일만 했잖아? 결국 소련이라는 나라, 그렇게 해서 망한 것 아닌가. 책은 지금은 몰락한 ‘현존사회주의’에 대한 우울한 예언서이기도 했다.
세 번째는 스페인이라는 나라에 대한 것. 영국인 오웰의 눈에 비친 스페인 사람들은 느긋하고, 마냐나(모든 일은 ‘내일’로 미루자) 정신에 투철하고, 비효율적이고, 너그럽고, 순수한 사람들이다. 스페인 사람들(그리고 스페인의 ‘기차’들)에 대한 오웰의 묘사는 시니컬하면서도 애정이 묻어난다.
“스페인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들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스페인 사람들 중에 현대 전체주의 국가가 요구하는 지독스러운 효율성과 일관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285쪽)
스페인에 가본 적이 없으니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발렌시아, 빌바오, 말만 들어봤지 통 모른다. 내게 그런 지명들은 FC바르셀로나, 레알마드리드, 발렌시아, 애틀레틱 빌바오 같은 클럽들과 동급인 이름들이다. 스페인 축구는 재미있고 아름답지만 어떻게 보면 실속 없고 느슨하다. 남미 축구 비슷한데 또 남미 축구처럼 아주 화려하거나 낙천 그 자체인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오웰이 묘사한 1930년대 ‘전시’의 스페인 풍경도 꼭 내가 지금 보는 스페인 축구 같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지식인의 기록은, 그가 스페인을 떠나면서 끝난다. 오웰은 70년 전 당시의 현재와 미래를 말하고, 나는 70년 뒤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를 읽는다. 우리의 현재가 오웰이 그린 미래가 아니고, 그의 미래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미래로 남아 있다. 그렇게 카탈로니아에서 오웰과 나, 역사와 현재와 미래가 만난다. 내전은 70년 전 일이라는데 나는 이제야 그 여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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