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리오리엔트- 지구를 반대로 돌려보는 법

딸기21 2006. 7. 13. 09:59
728x90

리오리엔트 ReORIENT : C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은이) | 이희재 (옮긴이) | 이산 | 2003-02-21




간만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이산에서 나온 다른 책들처럼 이 책 역시 알차다. 동어반복 같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저자가 되풀이해서 자기 논지를 정리하면서 넘어가니깐 머리 나쁜 학생이 이해하며 읽기엔 더 좋다.


원제는 ReORIENT: Global Economy in the Asian Age 라고 하는데, 저자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브라질과 멕시코, 칠레에서 교편을 잡았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 곳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글로벌한 교수님인데, 젊었을 적에는 종속이론에 천착했고 뒤에도 줄곧 글로벌 경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했다고 한다. 책에는 왈러스틴이나 사미르 아민 같은 사람들 얘기가 많이 나온다(물론 개인적인 얘기가 아니라 학문적인 이야기이다;;)


제목만 보면 ‘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찬하는 척하면서 ‘유럽대신 중국 시대’ 식의 논리를 펼칠 것만 같았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저자 자신도 그런 비판이 나올 것을 상당히 의식한 듯하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젊은 시절의 자신도 포함해서, 경제(사)학자들이 세계경제를 유럽(서방)의 눈, 유럽의 기준으로만 바라봤다는 데에서 반성에서 출발한다. 유럽을 기준으로 경제사를 보았던 탓에 세계 경제의 흐름을 편협하고 왜곡되게 인식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글로벌 경제 자체의 역사적 함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으며 오늘날의 세계경제와 앞으로의 전망 또한 올바로 분석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역사가는 나무만 보면서 글로벌 경제라는 숲을 무시했다”고 단언하면서, 유럽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선학들과 동학들을 통틀어 비판한다. 이 비판의 도마에는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같은 전세대 인물들부터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려 애썼던 왈러스틴이나 아민 같은 이들도 모두 오르내린다. 대신 저자는 재닛 아부 루고드나 K.N.차우두리 같은 신진 학자들의 새로운 시각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


1장(현실의 세계사와 유럽중심적 사회이론의 대결)에서는 학계의 지배적인 흐름을 비판하면서 ‘유럽중심주의가 아닌 글로벌리즘’에 눈뜨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2장(세계무역의 회전목마 1400~1800년)에서는 세계경제에서 그동안 무시돼오다시피 했던 ‘유럽 이외 지역’의 경제 흐름들을 살핀다. 요는, 서아시아와 인도양, 동남아시아, 중국, 중앙아시아 등등 유라시아 곳곳에서 적어도 1400년대부터는 ‘세계화’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는 것이다.


저자 자신도 인정하듯 ‘1차 사료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2차 사료를 꼼꼼히 검토해 전근대의 무역 흐름을 조망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재미있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아시아의 일원인 한국의 역사교육에서는 거의 배제됐던 인도양 지역과 동남아시아 등지의 활발한 무역관계에 대한 것들이 인상적이었다. 포르투갈 상인이 말라카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당대 무역의 중심이던 말라카에 포르투갈 상인이 입성하려 애를 썼다는 것인데, 이것만 해도 ‘발상의 전환’이다.


3장(화폐는 세계를 돌면서 세계를 돌게 한다)은 1400~1800년 세계경제의 굵직한 흐름(말 그대로 유통)을 만들어냈던 가장 중요한 원자재로서 ‘화폐’라는 것의 가려진 측면을 부각시킨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라는 식민지를 갖게 됨으로써 얻은 것은 자원과 노동력, 시장 등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저자는 화폐의 재료인 은(銀)이 가장 큰 자산이 됐다고 말한다. 유럽은 아메리카의 은을 가져다가 아시아에 건넴으로써 ‘글로벌 카지노’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의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던 것은 중국이었고,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지역의 생산력이 유럽을 앞섰기 때문에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


저자는 엄청난 양의 은이 아시아로 쏟아져 들어간 뒤에도 아시아지역의 인플레가 극심하지 않았다는 점, 인구증가가 계속됐다는 점 등을 들며 ‘아시아가 갑자기 망해버린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4장(글로벌 경제-비교와 관계)은 수백년간의 그같은 ‘아시아 우위’를 증명해보이는데 할애됐다.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인 동시에 가장 많은 논란이 벌어질 수 있는 부분은 5장(횡으로 통합된 거시사)이다. 저자는 세계경제를 콘드라티예프 장기사이클에 맞춰 세계사의 흐름을 규정하려 시도한다. 경제학 책에 나와있는 모든 사이클 중 가장 장기적인 사이클이라는 이 사이클의 A국면은 상승국면이고, B국면은 하강국면이다. 저자는 아시아가 쇠락한 듯 보이지만 그 쇠락은 비교적 최근에 이뤄졌다는 것(적어도 1800년대 이후), 유럽이 잘나서가 아니라 아시아가 B국면으로 접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유럽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유럽인들이 특별히 창조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상대적으로 비싼 노동력 등등의 차이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따라서 유럽은 20세기 ‘아시아의 용’들이 발딱 일어설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발주자의 이점’을 살렸을 뿐이라는 것 등을 강조한다.


저자도 여러 부분에서 윌리엄 맥닐을 인용하고 있지만, ‘세계의 블랙홀은 중국이었다’는 것은 맥닐의 주장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단절이 아닌 연속성 중심으로 보려고 애쓴 점이라든가 인구학적 모델들을 결합시킨 점(이게 요즘 유행인 모양이다) 등은 눈에 띄었는데, 남는 궁금증은 있다. 장기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경제에 무지한 내 눈으로 보기에도 과연 세계경제의 흐름을 ‘순환’으로 볼 수 있을지에는 의문이 생긴다. 


순환은 돌고돌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제아무리 나선형 순환이라 표현한다 할지언정 ‘순환’에서는 ‘반복’의 의미를 배제할 수 없다. 저자는 오늘날 중국의 용틀임과 아시아의 발흥을 이 순환의 상징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저자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순환적인 흐름이 과연 존재하는 걸까. 1000년전 세계 최고 부자였던 중국이 21세기 혹은 22세기에 다시 세계최고 부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우연’이 아닌 ‘역사의 순환’으로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6장(왜 서양은 -일시적으로-승리했는가)과 7장(역사서술의 결론과 이론적 함의)에 준엄하게 표현된 저자의 역사론은 군데군데 지루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아프리카는 무시당하는구나, 쉽게 말하면 저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