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동물원의 탄생

딸기21 2006. 3. 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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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의 탄생 Savages and Beasts: The Birth of Modern Zoo (2002)
니겔 로스펠스 (지은이) | 이한중 (옮긴이) | 지호 | 2003-08-30


독일의 칼 하겐베크라는 ‘동물 전시사업가’ 사례를 중심으로 현대적 동물원의 탄생을 조명했다. 책 읽는 동안 ‘제목에 비해 참 재미없다’는 생각을 했다. 독일 사례만 다룬 데다가 어째 영 저자의 시각도 ‘객관을 가장한 편파’인 것 같아서 입 내밀고 읽었다. 중반부 넘어가니 재미가 있고, 이 작업이 왜 의미가 있는지도 알겠다.



동물원, 즉 이국적인 동물을 전시하는 것은 인류가 나라를 만든 이래 생겨난 오래된 일이다. 따라서 ‘현대 동물원의 탄생’이라고 말하기 위해선 의미를 한정시킬 필요가 있다. 저자는 전근대 시대 유럽 왕실이나 귀족들이 취미삼아 이색 동물들을 모았던 ‘미네저리’와 구분되는, 일반인들도 가서 보고 구경하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교육시설 간판을 내건 동물원의 탄생’으로 논의를 한정하면서, 그런 동물원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런 동물원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첫째 이국 동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준 서구인들의 식민지 정복, 둘째 ‘보통 사람들’의 ‘교양 욕구’ 같은 사회적 조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동물원들은 모두 이 두 가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니 동물원은 제국주의의 속성과 현대 부르주아의 감수성이 결합돼 나타난 산물인 셈이다. 여기서 제국주의의 속성에는 비(非)서구에 대한 우월감(폭력), 그리고 그것과 맥을 같이 하는 자연에 대한 우월감(폭력)이 뒤섞여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20세기 초반 하겐베크라는 걸출한 사업가의 사업영역이 이누잇이나 인도인, 아프리카인 등 ‘인간 전시’(원주민 쇼)로 확장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현대적 동물원 개념의 바탕이 된 당대 유럽인들의 사고구조로 봤을 땐 전혀 논리적으로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동물원의 동물들 뿐 아니라 사람 쇼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도 당대의 팜플렛이나 기고문 같은 여러 자료를 동원해 상세히 설명한다. 너무 상세히 설명하는 까닭에, 이걸 시시콜콜히 다 알아보고 있을 필요가 있었으랴 싶을 정도다(지엽적인 문제에 천착하여 귀납을 이끌어내는 전통이 없는 이 쪽 문화에선, 독일이나 일본 같은 쪽의 이런 연구가 부럽다 못해 얄미워지곤 한다).


“1886년 북해에 있는 노르도스틀란트의 북쪽 해안에서 바다코끼리 370마리가 단 한 척의 배의 선원들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대자연은 370의 자녀수만큼 가난해졌고, 배는 370의 가죽만큼 부자가 되었다.” (p.297)


서양의 제국주의, ‘사람 쇼’로까지 이어졌던 그들의 우월감. 동물원에 동물들을 데려와 ‘과학교육용’ 심지어 더 나아가 ‘동물 보호를 위한 노아의 방주’라고 홍보하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자연 상태의 동물들을 희생시켰을까. 저자는 그런 것을 ‘너무 담담히’ 말하는 스타일이다. 저자는 ‘동물원을 만들겠다고 동물들을 떼로 죽인 인간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부분에서 폭력적인 측면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얼버무리나, 지금? 책 읽으면서 속을 욕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찝찝한 것이 계속 남아 있었다.


“가령 칼 하겐베크에게서 즉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상 두 가지를 들자면, 그가 동물 거래상이었다는 점과 동물 애호가였다는 점이다.” (p.327)


나는 하겐베크와 다른가? 하겐베크라는 인물은 독일에서 탁월한 사업가를 넘어 동물 애호가로 이름이 높았고 말년엔 영웅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현대 동물원의 속성, ‘동물원의 이데올로기’는 하겐베크 이래로 바뀌지 않았다. 


요는, 내가 동물원을 좋아한다는 거다. 나는 어쩌다 한번 동물원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몹시, 많이 좋아한다. 동물원의 이색 동물들은 꼭 가서 보고 자료라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까닭에 내 컴퓨터엔 동물자료가 심심찮게 쌓이곤 한다. 한때는 서울대공원 어디에 어느 동물이 사는지도 줄줄 꿰고 있었다. 슬렁슬렁 책장을 넘기는데 결국 내 아픈 구석을 찌르고야 마는구나. 나 같은 소시민은 소시민 근성을 들켰을 때에 가장 아프고 찔린다.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하겐베크 같은 지나간 시대의 인물들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의 나 같은 사람들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대체 어디서 왔는지는 묻지 않은 채 제국주의를 욕하면서 하마와 코끼리를 감상하는 사람들 말이다.


“사람 쇼의 인기가 감소된 것 같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문화에서 그런 쇼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다양한 지리 잡지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진기함이 대량 소비되는 숱한 토크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p.3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고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떠오른다... 칼 하겐베크와 같은 인물을 동물이나 사람보다는 돈에만 신경을 쓴 사람이라고 너무 쉽게 속단해버리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 서서 자신들이 이국 동물사업과 맺고 있는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 상호작용이란 케이블 채널의 ‘동물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행위도 포함하는 것이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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