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마야- 순전히 나를 위한 독후감

딸기21 2006. 3. 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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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Maya (1999) 

요슈타인 가아더 (지은이) | 이용숙 (옮긴이) | 최재천 (감수) | 현암사 | 2004-03-20


군더더기 겉표지 없는 하드커버에 바랜 듯한 종이, 책 모양이 아주 맘에 든다. 가아더의 전작인 ‘카드의 비밀’을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지라, ‘마야’에 대해서도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다. 

책을 사놓은지는 좀 됐는데 이래저래 읽지를 못하다가 며칠 전에야 책을 펼쳤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카드의 비밀’ 후속편이라 해도 되겠다. 이번 책에도 조커가 등장하고 트럼프 카드들이 나온다. 하지만 책의 줄거리는 전작과 전혀 상관없으니 그저 기분좋게 추억을 떠올리듯 카드의 비밀을 간간이 떠올려가며 읽었다. 

‘소설로 읽는 진화생물학’이라고 되어있고 최재천 교수가 감수자로 이름을 올려놨다. 가아더가 대체 어떤 식으로 진화생물학을 다뤘을까,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진화생물학이라는 소재보다는 나는 오히려 얼마전에 읽었던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에 나오는 절대적인 정신이라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서 ‘마야’를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생물학 개념들을 다룬 묘하고 현학적인 표현들, 폼 잔뜩 잡은 멋진 구절들에 몰두하며 읽는 방법.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어떤 것이 무無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고 우리는 묻는다. 혹은 반대로, 어떤 것이 끝없이 항상 존재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어본다. 어찌 됐든, ‘우주의 물질이 어느날 아침에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될 가능성’을 점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두 번째 방법은, 저자가 화두로 던지는 철학적인 주제들이 머리 속에서 윙윙 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갈피를 못 잡게 붕 뜬 상태로 눈길 가는대로 글자를 따라가보는 것,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잠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유한한 삶에 대해 과연 나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반문해보는 것. 나는 내가 영원한 삶을 꿈꾸는 인간이라는 걸 확인해버렸다.

내 삶이 끝난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벌써 거의 지쳐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내가 일단 죽고 나면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야. 결코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거지. 꼭 여기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어. 지구가 속해 있는 이 은하계로 말이야. 장소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은하계에서 내 운명을 시험해보는 것도 생각해... 그러니까 출발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인 거지.

나는 도롱뇽과 같은 종족에 속해. 내가 이처럼 짧은 시간만 여기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내 뇌는 지나치게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는 거야. 삶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얼마나 철저히 내버려져 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면서도 화나는 일이야. 그건 정당하지가 않아.

세 번째 방법. 책에 등장하는 기묘한 ‘아방가르드 양서류’ 중 누군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읽는 방법. 인간이란 실은 얼마나 기묘한 존재들인지! 나는 노르웨이 출신의 썰렁한 생물학자 프랑크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꽤 긴 시간을 한눈에 조망하려는 시도를 해왔어. 그러다 보니 벌써 호기심 가득한 열두살 때 빅뱅을 알게 되었고 우주의 광대한 거리에 대해서도 줄줄 꿰게 되었지. 점점 이해력이 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오십억 년이나 된 별이고 우주는 그보다 서너 배는 더 늙었다는 사실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말았던 거야.

네 번째 방법, 연애소설로 읽는 것. 책은 피지의 타우베니라는 작은 섬,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최후의 낙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아내와 몇 달 전에 헤어졌지만 마음으로는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생물학자, 한때 잘나가는 플라멩고 댄서였던 아름다운 스페인여성과 그 애인, 애증으로 똘똘 뭉친 속물 아버지와 이상주의적 환경운동가 딸, 아내와 사별한 중늙은이 작가. 진화에서 ‘진보’라는 것은 적절한 표현인가? 지구의 역사에서 어느날 양서류가 뭍으로 올라온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나? 혹은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세계정신이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룩한 업적이었나? 이 모든 것에 대한 토론은 결국 ‘사랑’으로 향해 간다.

‘우리는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제까지 내가 이 세계를 얼마나 일반화하여 이해했고, 지상에서의 내 짧은 삶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축소시켜 바라보아왔던가를 깨닫게 되었지. 안나와 호세는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생각, 그러니까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가를 일깨워준 셈이야.

인도 철학에서 브라마와 대비되는 환영幻影을 가리키는 마야, 고야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 마야, 독특한 역법曆法을 썼던 남미의 제국 마야. 역자의 말대로 ‘꿀벌 마야’를 제외하고, 우리가 선뜻 상상할 수 있는 여러 ‘마야’들이 중의적으로 책 곳곳에 등장한다. 마야는 마야대로 재미있고, 미술사는 미술사대로 재미있고, 등장인물들(그리고 도마뱀 한 마리)의 대화는 대화대로 재미있다.

‘가든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최후의 낙원’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그 이름을 쓰는 것이 적합할 거야. 왜냐하면 몇십 년만 지나도 벌써 그 ‘최후의’라는 단어를 ‘잃어버린’으로 바꿔야 할 테니까 말이야. 이 섬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 작은 차이를 아마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천부의 권리’라는 개념은 이천 년이 넘는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 도대체 우리는 언제 ‘천부의 의무’란 개념을 사용할 만큼 충분히 성숙할 수 있을까?

오늘날 그들은 쉘과 텍사코가 되었지. 이름 없는 네발동물이 순환기 속으로 들어간 거야. 그들은 세계정신의 검은 피야. 너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있어? 자동차가 백악기 시대의 피를 기름 탱크에 채우고 이 근방을 돌아다닌다는 생각 말이야.

최후의 낙원, 천부의 의무. 인류의 오만에 대한 촌철의 비판은 덤으로 얻은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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