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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의 행방과 리비아 시나리오

딸기21 2011. 8. 2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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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반군이 격전 끝에 무아마르 카다피(69·아래 사진)의 요새인 바브 알 아지지야를 23일 점령했다. 그러나 카다피와 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 등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카다피의 행방과 향후 움직임은 리비아의 민주화 및 새 국가수립 전 과정에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반군은 요새를 장악한 뒤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 “도망갔다”고만 밝혔다. 과도국가위원회 압델 하피즈 고가 대변인은 24일 로이터통신 등에 “카다피가 리비아 중부나 남부로 피신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부 외신들은 요새 지하의 ‘비밀터널’을 통해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카다피가 여성과 어린이들을 ‘인간방패’ 삼아 ‘호화벙커’에 숨어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서방 언론들의 추측일 뿐이다.

 
사실상의 과도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국가위 측은 카다피가 되도록 빨리 저항을 포기하고 해외로 도주·망명하기를 바라고 있는 눈치다. 국가위는 “카다피를 체포해 재판하겠다”면서도, 국외로 도피하려 한다면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뜻을 시사해왔다.

 
카다피는 요새가 함락된 뒤에도 “결사항전”을 선언하면서 순교를 불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독재자들이 결사항전으로 반군에 맞서는 경우는 실제론 많지 않다. 

튀니지의 지네 벤 알리 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1990년 실각 뒤 영국 런던으로 도망쳤다가 2000년 칠레로 소환돼 가택연금 상태에서 숨졌다.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하와이로 망명, 그곳에서 1989년 사망했다. 카다피도 해외도주를 택할 수 있다. 이미 카다피의 아내 소피아와 딸 아이샤 등이 외국으로 떠났다는 점이 망명 가능성을 높여준다. 

 
독재자의 해외도피는 당장은 분쟁을 끝내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뒤에 민주화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피노체트는 끝내 처벌받지 않았고, 칠레는 20년이 넘도록 군부독재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 

필리핀은 과거사를 청산 못해 족벌가문과 부패한 관료층이 온존해 있다. 마르코스 집안이 지난해 선거에서 정치적으로 부활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는 왜곡됐고, 외세에 기대는 구조도 그대로다. 인도네시아도 수하르토 옛정권을 ‘청산’하지 못해 부패구조와 정치적 분열이 이어지고 있다.

 
도주한 독재자들의 은닉재산도 문제가 된다.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의 악명높은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는 1996년 해외 체류 중 반군에 쫓겨나 망명지에서 숨졌지만 그 일가가 스위스 등지에 숨겨둔 재산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다피의 해외자산은 각국이 동결시킨 상태여서 국가위와 새로 꾸려질 정부에 거의 전액 전달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카다피가 숨겨둔 재산이 모두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카다피 잔당이 시르테 등지에서 계속 항전할 경우는 어떨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 지도자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가 여전히 산악을 누비고 있고, 아프간 새 정부는 10년간 전쟁에 발묶여 있다. 리비아 반군은 전국을 거의 장악했으니 아프간처럼 분쟁이 길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새 국가 수립 과정은 국가위 주도로 계속 진행될 것이다. 다만 카다피 잔당이 버티면 버틸수록 정국안정은 늦어진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고향 티크리트에 숨어 있다가 비참한 몰골로 붙잡혔다. 이라크 새 정부는 특별재판소를 만들어 재판한 뒤 후세인을 처형했다. 카다피가 고향인 시르테나 사막기지 사브하에 숨어있다가 몇주, 몇달 뒤 붙잡힐 수도 있다. 

카다피는 이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된 상태여서 리비아 측이 독단으로 처분을 결정하긴 쉽지 않다. 인디펜던트 등 서방언론들은 “카다피를 반드시 ICC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새 정부가 카다피를 ICC에 넘겨 ‘처분’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리비아 측과 국제사회 간 마찰이 일어날지 모른다. 카다피 재판이 길어지면 애써 진압된 잔당들이 다시 들고일어날 수 있고, 리비아 새 정부는 이를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다피가 체포된 뒤에도 잔당들이 저항을 계속할까. 이라크에서는 후세인 체포 뒤에도 잔존세력이 무장저항을 계속했고, 여기에 알카에다가 끼어들어 한동안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자국민의 힘으로 민주혁명을 이뤘다는 점에서 리비아는 이라크와 다르다. 리비아 국가위는 옛 정권 관리들과 치안인력을 최대한 흡수하려 애쓰고 있다. 이라크에서처럼 전 정권 세력을 벼랑으로 몰지 않기 위해서다. 새 나라를 세울 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국가위가 물리력을 완전 장악하지 못할 경우, 옛 세력과의 타협은 위험이 될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혁명세력이 물리력을 쥐고 있지 않은 탓에 군부가 과도권력을 장악했고, 민주화 조치가 늦춰지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근거지인 바브 알 아지지야를 장악한 반군들이
23일 카다피의 동상을 부순 뒤 머리 부분을 짓밟으며 환호하고 있다. | AP
 

 

이슬람세력이 발흥할 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사이프가 끝까지 살아남아 외부 이슬람세력을 끌어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알자지라방송은 24일 “사이프는 카다피 집권시엔 상대적으로 개혁적이었지만, 궁지에 몰리자 이슬람집단과의 연계도 불사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보도했다. 

 
옛 유고연방의 학살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실각 몇 개월 뒤 자택에서 체포됐으나,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민족·종교적으로도 복잡하게 꼬여 있던 옛 유고연방은 결국 갈가리 찢어졌다. 리비아의 경우 부족주의가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나라가 갈라질 것 같지는 않다. 

 
만일 카다피가 교전 중 사살되면 말 그대로 ‘순교자’가 된다. 국가위에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 혹시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 공습에 숨지기라도 하면 국제적 논란이 될 것 같다. 나토의 군사개입은 어디까지나 ‘대량학살을 막기 위한 인도적 차원’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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