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 우리의 분노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딸기21 2011. 8. 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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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기가 팍팍하다. 성나고 열받을 때도 많다. 명색이 기자임에도 집에서 TV 뉴스를 보지 않는다. 핑계를 대자면 ‘아이 교육 때문에’다. 뉴스를 보다 보면 자꾸만 화가 나고,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온다. 고상하고 지적인 엄마의 이미지는커녕 동네 욕쟁이 아줌마로 보이기 십상이다. 때론 나의 분노를 어디다 풀어야 하나 고민스럽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하다. 분노의 이유는 제각각이겠지만, 화가 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대숲에 가서 혼자 외칠 수도 없고, 성난 걸 욕설로라도 풀고픈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다보니 웹이 분노가 쏟아져나오는 마당이 된다. 그런데 이 마당에서의 욕설과 분노는 대상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돼 있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충남 태안에서 길이 4m짜리 가오리가 잡혔다는 온라인 기사가 떴다. 댓글이 수백개 달렸다. “가오리가 아니고 코끼리 같아요” “저것도 먹을 수 있나요” 등등의 산만한 댓글들 속에 난데없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들먹이는 댓글들이 주르르 보인다. 태안 앞바다 가오리가 전 대통령과 무슨 상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따먹 춘향’ 발언에 대한 댓글 중 광주의 어느 학교를 언급한 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남원 주민들이 김 지사를 비난했으면 비난했지, 거기에 대고 왜 광주를 운운할까.

이슬람 혐오증에 빠진 노르웨이 극우청년이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다. 이슬람 혐오증을 다룬 블로그 글에 “무슬림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미성년자까지 다 강간하고 토막살해를 저지르고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한국의 이슬람 혐오증 환자들은 저런 말 안 되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걸까.


 

경향신문 웹페이지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댓글을 연계한 ‘소셜댓글’을 도입한 뒤 댓글 수가 확연히 늘었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면 웹세상이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이 분노의 화살표들은 왜 저기로 향할까. 이 비논리적인, 그러나 때때로 일관되게 보이는 분노의 행렬은 우리 사회를 어디로 끌어갈 것인가. 

오로지 욕설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팔로잉도 팔로어도 하나 없는 트위터 계정. 오로지 특정 지방을 욕하는 댓글만 다는 미투데이 사용자. 이것들이 이른바 ‘친정부 반좌빨 댓글알바’들? 하지만 가수 옥주현을 향한 날선 악플들, ‘무슨무슨녀’에 대한 신상털기들을 모두 정치적 증오감정으로 보기는 힘들다.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에 증오감정이 팽배해 있고, 그것이 웹이라는 익명·반(半)익명의 공간에서 여과없이 표출된다는 점이다. 그런 이들에게 한 가지 일관성이 있다면, ‘약자’를 향해서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이다. 

실명 공간에서 대놓고 맞서기 두려운 대상, 즉 권력을 향한 공격이 익명의 공간에서 터져나오는 게 아니다. 그 반대로 어떤 형태로든 기득권을 갖고 있거나 누려온 이들이 약자를 향해 익명의 가면 뒤에서 증오를 뿜어낸다. 그들의 발판 중에는 지역적 기득권도 있고, 성적 정체성에 따른 기득권도 있고, 한국사회에서 힘 과시하는 종교를 믿는다는 종교적 기득권도 있고, 순혈주의를 뽐내는 인종적 기득권도 있다. 그들이 더 약한 이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니, 아이러니다. 정작 성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데.

악플 반대 캠페인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분노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다. 분노는 필요하다. ‘온라인’ 즉 ‘연결된다’는 것이 억눌려 있던 이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일깨워주고 싸울 힘을 가져다줄 때도 많다. 

인도네시아 파푸아의 광산 노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과 비교, 자신들이 얼마나 모멸적인 저임금을 받아왔는지 깨닫고 얼마 전 파업을 벌였다. 이집트의 철권독재자도 SNS를 매개로 한 분노의 혁명 앞에 무너졌다. 오죽하면 유럽에서는 ‘분노하라’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잖은가.

트위터에서 일어나는 운동이 생산적이고 에너제틱할 때도 많다. 반값 등록금 논란도 그랬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포퓰리즘이니까 안돼!”라고 강변했지만 트위터에서는 반값 등록금이 과연 대안인지, 세금을 지원해주는 게 옳은지, 이쪽저쪽 의견들이 오가고 토론이 이뤄졌다. 잇속 차리는 대학들에 대한 분노가 정책적 논의로 승화된 곳은 오히려 웹이라는 공간이었다.

문제는 인터넷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는 다 화가 나 있다. 분노를 ‘억누르라’고만 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방향이 문제다. 분노의 방향이 사회적 약자로 향할 때엔 차별이 되고 말 못할 폭력이 된다. 

지금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의 분노를 표출해야 할까.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분노의 대상과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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