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칼럼

[아침을 열며] 한국에서 잡스가 나오려면

딸기21 2011. 7. 4. 09:44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리아계 이민2세로 태어났다. 잡스의 아버지는 압둘파타흐 잔달리라는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여성이었다. 잡스의 부모는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하던 사이인데다 둘 다 학생 신분이었다. 어머니는 생후 일주일된 아들을 입양보냈다. 아버지는 뒤에 미국 대학의 정치학 교수가 되어 잡스의 어머니와 결혼했지만 잡스는 친부모에게 돌아가지 않고 입양된 가정에서 자랐다.
 
오라클을 세운 래리 엘리슨은 아버지가 이탈리아계 미군이었다. 역시 부모가 정식 결혼한 사이가 아니어서 어머니 혼자 아이를 낳았다. 엘리슨이 생후 9개월에 폐렴에 걸리자 어머니는 아이를 친척집에 입양을 보냈다. 입양된 가정은 러시아 출신 이주자 집안이었다. 엘리슨은 생물학적으로나 양육 환경에서나 이중적으로 이주자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는 1964년 뉴멕시코주에서 태어났다. 10대 소녀였던 어머니는 곧 이혼했고, 아들이 5살 때 쿠바계 이민자와 재혼했다. 그래서 베조스는 히스패닉계 이름을 갖고 이주자 가정에서 자랐다.


 
 
미국 각 도시 시장들이 만든 초당파 싱크탱크 ‘새로운 미국경제를 위한 파트너십’이 미국내 500대 기업을 들여다보니, 이주자나 그 자녀가 세운 회사가 전체의 40.8%인 204곳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전화를 발명하고 AT&T를 세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골드만삭스의 마커스 골드만, 포드자동차의 헨리 포드 등이 이주자 출신이다. 벨은 스코틀랜드, 골드만은 독일, 포드는 아일랜드계다. 오래된 기업의 창업자들은 대개 미국과 같은 서구문화권에서 온 이주자들인 반면 IT분야의 신흥 대기업들은 창업자 가족의 출신지가 훨씬 다양하다. 인텔을 세운 앤드루 그로브는 헝가리, 구글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 출신이다. 

썬마이크로시스템스 공동창업자인 안드레아스 본 벡톨셰임은 독일계, 비노드 코슬라는 인도계다. 컴퓨터 어소시에이츠의 찰스 왕은 중국 상하이 태생이고, 야후의 제리 양은 대만계다. 이주자 가정 출신들 중 성공한 창업자가 많은 이유에 대해 포브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전하는 기질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 요즘 새삼 이주자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일부 주정부들과 연방정부가 갈수록 미국을 ‘이주하기 힘든 나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애리조나주의 산불도 이주자들 탓이라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반면 다시 문호를 열어야 미국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반론도 커지고 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미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에 와서 열심히 일하려는 이들에게 문을 닫는 건 국가적인 자살행위”라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백악관은 아일랜드계 이주자가, 의사당은 영국 출신 이주자가 설계했는데 지금 그 의사당에서 이주자를 막을 방안을 논하고 있느냐”고 일갈했다. 뉴욕의 경우 인구 820만명 중 40%가 외국 출신이다. 인도계 경제학자 비벡 와드하는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미국 경제가 침체된 지금이야말로 똑똑하고 야심찬 이주자들을 받아들일 때”라 주장했다. 비즈니스위크에는 히스패닉 이주자들의 창업붐 덕에 쇠락에서 벗어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이야기가 실렸다.
 
한국은 어떨까. ‘다문화’라는 말이 어느 새 귀에 익은 용어가 됐으나 어느 분야에서나 ‘순혈주의’는 여전하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3월부터 ‘다문화 IT방문지도사’라는 걸 만들어 이주자 가정의 디지털 적응을 돕기 시작했고 LG가 최근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이중언어 인재’로 키우겠다며 다문화학교를 개설했다. 이달 1일부터는 이주여성 4명이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 

하지만 이주자들이 체감하는 ‘한국의 개방 정도’는 어느 정도나 될까.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흔들리자 대통령이 나서서 “한국인을 우선 채용하라”고 했고, 그걸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 속엔 ‘외국인들이 와서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인식이 들어 있다. 노래경연에서 중국계가 1등을 하는 것조차 박수의 물밑에서 비아냥이 들려온다.
 
세상을 바꾸는 도전과 혁신은 사회의 ‘주류’가 아닌 ‘변두리’에서 나온다. 이주자들의 기본 인권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그들이 가져다줄 도전과 혁신의 에너지를 기대하는 건 염치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세계무대에서 애플과 경쟁한다는 국내 기업은 ‘핏줄 승계’를 준비하는 마당에, 잡스 같은 기업인이 나오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중삼중으로 둘러쳐진 순혈주의의 벽을 깨야 한다. 이주자들에 대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와 도전정신과 재능을 우리 것으로 삼고 이용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