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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글로벌 시대의 신랄한 풍자

딸기21 2005. 3. 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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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Patas Arriba: La Escuela Del Mundo Al Reves (1998)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은이) | 조숙영 (옮긴이) | 르네상스 | 2004-06-15


신랄함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흔히 말하는 ‘씨니컬’하다는 것, 냉소, 차가운 웃음, 이런 것이 신랄함의 한 종류가 된다. 냉소를 듣고 나면 씁쓸하다.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진다. 나는 그만 ‘너나 잘해보시지’ 하는 심사가 되어버린다.


냉소와 다른 맥락의 신랄함, 유쾌한 비꼬기도 있다. 갈레아노의 글이 그렇다. 비유는 비유이되 작은따옴표가 없으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농담인지 새겨들어야 한다. 귀담아 듣다보며 모든 것이 농담 같으면서 동시에 진담이다. 

"이 책에는 공범이 많다. 그들을 고발하는 일은 즐겁다. 1013년에 사망한, 멕시코의 위대한 예술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만이 오로지 죄가 없다. 이 책에 실린 삽화들은 그도 모르는 채 출판되었다. 우선 나는 엘레나 비야그라, 카를 휘베너, 호르헤 마르치니와 그의 컴퓨터 마우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음의 사람들도 내 범행 유혹을 읽고 논평을 해주면서 사악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또한 좌절하고 절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 성녀 리타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거꾸로’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은 범죄행위로 몰리기 십상이다. 비꼬기의 귀재, 갈레아노의 재치가 넘쳐나는 서문. 책은 더러운 세상을 비꼬는 해학으로 가득 차 있다. 던지듯, 내지르듯 진실을 떨구어 놓으니 이것이야말로 ‘광대극’이고 명쾌한 풍자다. ‘거꾸로’는 무엇이며 ‘학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우리는 어릿광대가 펼쳐 보이는 신랄한 한 판의 광대극이 진실임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책은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에서 쓰이는 교과서 형식으로 되어있다. 말이 좋아 교과서이지, 그다지 치밀하진 않다. 역사, 민주주의, 폭력, 환경, 매스미디어 등등 오만가지 주제를 섭렵하면서 속사포같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문장이 주옥 같냐면, 그건 아니다. 이 책이 지겨워져 신물 나거나, 이 세상이 우울증 걸리도록 신물 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고문: 고통을 주는 새로운 기술(종교재판소), 적당한 신체적 고통(이스라엘 대법원), 불법적 핍박(라틴아메리카), 벙어리마저도 불게 하는 기술(갈레아노)
법: 거미줄과 같아서 파리 같은 작은 곤충은 잡지만 커다란 짐승의 진로를 방해하지는 못함
우연한 사고: 자동차가 저지르는 범죄
존엄: 칠레 독재시절 어느 수용소의 이름
평화와 정의: 1997년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을 살해한 준군사조직


거꾸로 된 교과서의 용어들은 대부분 이렇게 용도 변경된 단어들이다. 

"평생 마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은 무역의 자유를 거스르는 그 용서할 수 없는 불경스러움을 비난하며, 중국 해안에 전함을 파견했다. 여왕은 두어 차례를 제외하고는 1839년 시작되어 20년 동안 지속된 아편전쟁 기간 동안 전쟁이란 단어 역시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다."

유행하는 말로 하면 ‘뒤집어보기’이지만, 어느 쪽이 제대로 본 것이고 어느 쪽이 거꾸로 본 것인가. 영국의 중국 침탈이 잘못된 것인가, 빅토리아 여왕을 감히 ‘19세기 최고의 마약 거래상’이라 부르는 갈레아노의 입담이 잘못된 것인가. 

"1997년 브라질리아를 방문 중이던 인디언 지도자 갈디노는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다가 산 채로 타 죽었다. 좋은 집안 출신의 십대 다섯 명이 술을 마시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그에게 알코올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다. '거지인 줄 알았어요.' 1년 후 브라질 법원은 살인 의도가 명백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가벼운 금고형에 처했다. 법원의 기록관은 이렇게 말했다. 소년들은 가지고 있던 알코올의 반 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바로 그 점이 ‘살인이 아니라 즐기려는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인디언 ‘지도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자고 있었는지는 묻지 말자. 책은 역사와 지역,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거꾸로 된 진실’의 잔치이며 곳곳에 유혈이 낭자한 ‘자본주의 잔혹사’다.

세상이 거꾸로 된 것인가, 책이 거꾸로 된 것인가. 거꾸로 된 세상과 진실 사이, 장자의 꿈처럼 나비가 날아다닌다. 세기말과 세기초의 호접몽(胡蝶夢). “세계에는 1억 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흩어져 있다. 이 장치는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폭발하고 있다. 어린이를 유인하기 위해 고안된 어떤 지뢰들은 어린이의 눈길을 잡아끄는 인형이나 나비, 색색의 잡동사니 모양을 하고 있다. 희생자의 반 이상이 어린이들이다”. 갑자기 눈물이 난다. ‘양심이라는 불편한 분비선을 달고 태어난’ 덕일까.

그 날카로운 펜 끝으로 군더더기 분비선을 쿡쿡 찔러놓고, 갈레아노 스스로도 미안했나보다. "어떤 시간이 될 지 알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바라는 시간을 상상할 권리는 있다"고. 그리고 우리가 무기력하게 상상하길 포기했던 시간의 목록을 풀어놓는다. 거리의 자동차는 개들에게 짓밟히리라, 사람은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하리라, 역사가는 모든 국가가 침략당하기를 반긴다고 믿지 않으리라, 음식은 더이상 상품이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은 장사가 아니리라, 거리의 어린이는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으리라, 정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자 동시대인이 되리라... 

거꾸로 된 세상이지만 꿈꿀 수 있다면, 우리가 바라는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행복하다. 적들이 우리에게서 가져가려는 것이 바로 그것, 상상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었기에, 상상이 곧 힘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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