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방드르디, 그리고 '소설을 읽는 이유'

딸기21 2005. 1. 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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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지은이) | 김화영 (옮긴이) | 민음사 | 2003-11-20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이 소설의 제목을 들어본지는 너무 오래되었고, 읽은지는 며칠 되었다. 리뷰를 올리기까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방드르디의 생명력, 로빈슨의 철학, 그것들이 어우러져 어째서 내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이래서 소설을 읽는다. 철학, 역사, 과학, 결국은 한권의 소설이 그 모든 것들의 집결체가 아니던가.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세계'를 창조해냈다. 더불어 하나의 신화에 도전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도전했던 것은 이성과 합리성의 신화(서양의 신화)이고, 그가 만들어낸 것은 생명과 죽음을 오가는 역동성의 신화, 네이티브의 신화다. 



책의 앞부분은 로빈슨의 고독을 묘사하고 있다. 투르니에는 어쩌면 끊임없이 '고독'에 대해 상상하고, 느끼고, 즐겼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투르니에 할아버지, 젊었을 적부터 이렇게 고독을 곱씹던 사람이었던가. 고독한 철학자 로빈슨은 합리성과 진보, 서구문명의 상징이다. 섬을 '조직'하고 '건설'하는데 매진하는 로빈슨의 고군분투가 실감나다못해 귀여워질 지경이었다. 

철학자 로빈슨의 세계는 방드르디라는 他者의 등장으로 여지없이 흔들리고 무너져내린다. 로빈슨 스스로 방드르디라는 '작명'의 이유를 설명했듯, 처음에는 '사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던' 타자의 등장. 로빈슨은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 이 위계의 기반은 당연하게도 로빈슨의 문명이 가진 힘, 총탄과 화약이 지닌 힘, 파괴력이었다. 방드르디가 이것을 깨부수는 과정 또한 문자그대로 '파괴적'이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생명'으로서 방드르디의 모습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오래전 대학로에서 개그맨 출신 연극인 이원숭이 주연 겸 연출을 맡았던 '프라이데이'라는 연극을 본 적 있다. 투르니에에게서 시작된 '로빈슨 뒤집어보기'는 그 자체가 패턴화되어서 여러곳에서 반복됐던 모티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투르니에가 창조해낸 새로운 '방드르디'는 위계를 거부하는 연극속 프라이디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우아한 원주민도 아니고 야성의 절규는 더더욱 아닌 '어떤 인간' 방드르디에게는 파괴와 생명의 구분이 명확히 적용되지 않는다. 질서와 자유의 구분도 없다(물론 그것이 로빈슨을 당혹스럽게 했을 터이지만). 숫염소 앙도아르를 방드르디가 '재창조'하는 장면에 이르면 자연과 생명, 그리고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결합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는 웃는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폭소를 터뜨린다. 그 웃음은 총독과 그가 통치하는 섬의 겉모습을 장식하고 있는 그 거짓된 심각성의 가면을 벗겨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방드르디는 '노예'시절, 그 이후의 시절, 웃음으로, 생명력으로 로빈슨을 무력화한다. 그리하여 로빈슨으로 하여금 "해여, 나를 방드르디와 닮게 해다오, 웃음으로 활짝 피고, 송두리째 웃음을 위하여 빚어진 방드르디의 얼굴을 나에게 다오" 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로빈슨은 방드르디의 생명력에 불쾌해하다가, 마음속으로 모욕해보다가, 결국 동화되어버린다. 프란츠 파농이 "백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흑인의 생명력"이라고 지적했던, 바로 그 전형적인 '백인 심리'가 로빈슨에게서 진행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드르디의 모습에는 항상 '죽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앙도아르의 '죽음'을 통해 '자연의 소리'와 '비상(飛翔)'을 얻었듯이, 방드르디의 생명력은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닮고자 할 때, 자신의 문명적 기반을 거부할 때, 그렇게 로빈슨의 '극복'은 섬과의 화해, 혹은 합일과 함께 이뤄졌다. 그런데 삶과 죽음의 순환, 원주민의 생명력과 야만성, 방드르디의 생명력과 지성이 '죽음'의 냄새를 끊임없이 풍기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서방이 생명력 넘치는 부족 사회들을 죽였듯, 자연을 죽였듯, 결국 방드르디의 '예고된 죽음'(물론 그의 물리적 '죽음'이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은 투르니에식 문명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니에는 어째서 '마지막 희망'을 예비해두는 것일까.

책은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줬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줄거리 못잖게 재미있었던 것은 투르니에의 글쓰는 스타일이었다. 지적이고 발랄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에세이들을 통해 투르니에 할아버지를 먼저 만났던 내게는, '젊은 투르니에'의 정열적인 문체를 만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반면, 사족을 달자면, 투르니에 스스로 '투르니에 전문가'라 불렀다던 김화영 선생의 번역은 의외로 맘에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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