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딸기21 2004. 12. 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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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Invisible Giant (1995, 2003)
브루스터 닌 (지은이) | 안진환 (옮긴이) | 시대의창

유전자조작(GM) 농작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정작 GM콩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브라질의 유명한 '좌파 지도자' 룰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브라질은 세계적인 대두 생산국이고, GM콩과 일반콩 모두 대량재배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의 룰라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선진국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자국내 농가들 때문에 GM 문제에서는 함구하거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글로벌화'된 세계농업의 한 단면이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에는, 여주인공 타이코가 소학교 5학년 시절 우유를 먹기 싫어하는 친구 대신 급식우유를 마셔주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어린시절을 돌이켜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거의 강제적으로 실시됐던 우유급식, 그리고 아주 어린시절의 '혼분식 장려' 구호들 같은 것들. 이것은 '글로벌화'된 세계농업의 역사적 단면. 


2차대전 뒤 미국이 일본과 한국 등에 원조식량으로 밀가루를 퍼부으면서 '미국식 입맛'이 함께 이식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먹는 쌀을 생산하는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아저씨나 내 밥을 만들어주는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우리 밥상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떻게, 얼마나, 나의 밥상을 바꾸는데 관여를 했는지는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캐나다의 '농업분석가'라는 브루스터 닌은 수년간 발로 뛰어 모은 정보들을 총동원해 저 질문에 대한 일단의 대답을 찾는다. 

이 책은 미국의 초대형 농산물 유통업체(실제 사업분야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카길을 파헤친다. 카길의 사업분야, 사업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 저자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책' 자체만 놓고 봤을 때에는 많은 것이 아쉽다. 저자는 카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소개해놨지만 사실 재미는 별로 없다. 가장 큰 단점은, 카길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인'(Invisible Giant 는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런 거인을 쫓는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가 오히려 불분명하게 느껴진다는 점. 


다시 말하면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이는 책이 카길을 추적하는데에 전념할 뿐 글로벌 농업분업체계에서 양산되는 '피해자'들을 안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꼼꼼히 읽어봐도, 카길은 분명 '아주 나쁜 회사'는 아니다. 대체 글로벌화 시대에 '가장 나쁜 기업'과 '덜 나쁜 기업'을 나누는 기준이 뭐가 있겠는가. 대략적으로 봐도 카길은 월가의 기업들과 달리 '실물경제'에 관여하고 있는 기업이고, 자본의 지역 재투자라든가 환경정책 면에서도 다른 초국적기업들에 비해 특별히 나쁜 점수를 줄 이유는 없다. 


책은 카길의 사업확장 역사를 소개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회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기업홍보차원의 '기업사'를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분명한 것은 카길이라는 회사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늘에 가리워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 카길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92년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인공위성까지 소유하고 전세계 농산물을 주무른다는 거대한 회사, '칼로즈'로 대표되던 '미국쌀의 압력' 뒤에 이 회사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시 카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몬샌토와 합작해 생명과학회사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통해 카길은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책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카길이라는 회사가 대체 어떤 회사인지, 얼마나 거대한 회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만 이런 '농업 자이언트'의 존재가 곡물 한 알에 땀방울을 쏟는 세계 곳곳의 농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브라질이 어떻게 GM콩의 세계적인 생산국이 됐는지, 세계 곳곳에서 '농업의 글로벌화'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단편적인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수확 중의 하나다.


저자는 카길을 '자이언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괴물에 맞서야만 하는 농민들의, 그리고 어차피 밥상위에 놓인 무언가를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희망은 어디에? 아쉽게도 저자는 이에 대한 생각은 말미에 아주 간단히만 언급한다. 반다나 시바가 주창한 '사티아그라하(씨앗)' 운동과 같은 '풀뿌리 운동'만이 자이언트들의 밥상 지배에 맞서는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카길과 같은 회사의 실체를 알려주는 작업은 의미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그만큼 고민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고민해도 좋으니, 다음엔 누군가가 몬샌토에 대해 이렇게(이보다는 좀 재미있게) 파헤친 책을 써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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