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0, 무(無)의 역사와 의미를 다룬 책 두권이 나왔다. 로버트 카플란의 '존재하는 무 0의 세계'와 존 배로의 '無0진공'이다. 배로의 책은 원제가 아예 '무에 관한 책(The Book of Nothing)'이다.
카플란의 책은 0과 무의 개념을 '박물관 순례' 스타일로 설명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 탄생한 0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강적을 만나면서 세계관의 외곽(지평선 너머)으로 사라졌다가 인도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디지털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기까지, 대륙과 시대를 넘나드는 0의 여정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을 기호화하는 과정(반복적 추상화)을 통해 인간은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나귀가 사자가 되고 싶어하듯 마치 자기가 숫자인 것처럼 행세했던 0이라는 놈"은 인간의 사고체계에 알레고리를 부여하는 존재로 격상된다. 이 책의 묘미는, 수학 알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적인 자극을 한껏 찔러준다는데 있다.
반면 후자는 전자에서 소개된 0 개념의 발전과정은 앞부분의 소개에서 그치고 더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어린이들이 자주 던지는, 그러나 어른들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 아무것도 없는 상태, '무'의 실체를 볼 수 있을까? 0, 즉 '무'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해줄 수는 없을까. 우리의 0이 물질과 비물질, 존재와 없음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옴팔로스(세계의 배꼽)는 어디일까.
수학에서의 무가 0이라면, 현실에서의 무는 진공이다. 바로 그 진공이 우주가 시작된 곳, 우리 존재의 기반이다. 이 곳에서 0과 인간이 근본적인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진공은 그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에게 이 책은 "진공은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 즉 '무언가 조금 있는 상태'로 바꿔 가르친다. 이렇게 진공의 뜻이 바뀌는 과정이 곧 현대 물리학의 발전과정이다.
카플란의 책이 수학의 틀을 통해 무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배로의 책은 철학과 물리학의 틀을 넘나들며 0-무-진공의 무대를 오간다. 사실 쓱쓱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밑줄 쳐가면서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러나 챕터마다 들어있는 고전문헌의 인용구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배로의 문체가 익숙해지는 순간이 되면(적어도 앞부분 3분의 1은 읽은 뒤가 되겠지만) 책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이만큼 명료하게, 꼬치 꿰듯 다양한 우주론들을 설명해주는 책은 드물다. 국내에서는 95년 배로의 책('우주의 기원')이 번역된 적 있지만 저자의 '내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은 바로 이 책이다.
0이라는 숫자가 나타나는데 수천년이 걸렸든 인류가 캄캄한 밤하늘(진공의 세계)을 헤쳐가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인슈타인이라는 거인을 만났고, 그 거인의 어깨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됐다. 우주의 시작에 대한 '정답'은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인식의 지평선 너머를 보기 위해 애써온 이들의 '열정의 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딸기네 책방 > 과학, 수학, 의학 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임스 왓슨, 'DNA를 향한 열정' (1) | 2003.04.18 |
---|---|
별난 과학책 두 권- '양자 나라의 앨리스'와 '텔로미어의 모자' (0) | 2003.04.17 |
존재하는 무, 0의 세계 (0) | 2003.02.19 |
골드바흐의 추측 (0) | 2003.01.10 |
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0) | 2002.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