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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딸기21 2002. 12. 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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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한스 그라스만 (지은이), 염영록 (옮긴이) | 생각의나무




"이리넬은 앙칼지지도 않고 경망스럽지도 않은 그런 평범한 소녀였다. 그렇게 평범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소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리넬은 도망자였다."

<쿼크로 이루어진 세상>. 청소년을 위한 물리학 개론서 형식으로 돼 있는데, 특이하게도 1장은 <이리넬의 도망>이라는 소설같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서문 격인 이 글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마음이 아팠다. 세상에는 언제나 독재자(혹은 사람의 감정을 매몰시키고 사람의 생각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에게 도망치려는 사람들 또한 항상 있게 마련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를 피해 물리학 공부로 <도피>해 들어왔던 이리넬이라는 소녀처럼. 저자인 한스 그라스만은 이리넬과 같은 사람이 다음번에 도망할 때 도움을 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리넬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머리 속에 조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요슈타인 가아더의 <카드의 비밀>에 나오는 그 어린 소년의 모습이. 가아더가 그 어린 소년을 여행지로 불러들이면서 <철학>과 <자유>를 슬그머니 꺼내놓는 것처럼, 그라스만은 이리넬이라는 소녀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어느틈에 <물리학>과 <사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때문이다. 


철학, 자유, 그리고 물리학과 사색.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단어들이고, 실제로 두 책 모두 철학과 자유, 물리학(세상의 법칙)과 사색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결국 물리학이건 철학이건 <사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라스만은 말하는데, 이 사색이라는 말이 계속 내 머리를 쿵쿵 때렸다. 

"우리로서야 그 공식이 너무나 간단해서 암소나 파리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어깨를 으쓱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물리학은 아니다. 풀밭에 서있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 쉬면서, 오후가 되어 멀리 시선을 던져 그 공식에 대해서 사색에 잠긴다면, 그때서야 그것을 진정한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색하다'라는 말은 턱을 괴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생각에 잠기다'라는 말이 훨씬 나은 표현일 것 같다."

그렇게 사색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지혜로우면서도 관조적인 눈빛으로 볼 수 있는 비결이고,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조커 혹은 자유정신을 내쫓아버리지 않는 길 아닌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나같은 독자에게 그라스만은 학제적인 의미로서의 <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툭툭 던져준다. 나는 지금 왠지 모르게 신나고 두근거리면서도 조금은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던져준 화두에 뭐라고 답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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