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근 읽은 만화 한 편을 소개하면.
'하늘은 붉은 강가'는 바로 '나같은 사람', 나이도 잊은 채 어렸을 때 만화방에서 죽때리던 기억에 사로잡혀 헛된 망상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만화다.
여기서 잠시 딸기의 전사(前史)를 알아볼 필요가 있음. 국민학교 때부터 각종 만화방을 섭렵했었다. 그 때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만화 중의 하나가 바로 '나일강의 소녀' 시리즈였으니. 작가 이름은 당시 해적판에는 '유혜정'이라고 돼 있었음. 1부인 '나일강의 소녀'에 이어 '나일강의 여신', '나일강의 사랑', '나일강이여 영원히', 그리고 연속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나일강의 수수께끼'와 같은 후속편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대작이었다.
이 만화를 보고 고고학자가 될 결심을 했다니, 정말 어리긴 어렸던 것 같다. 여튼 대학교 1학년 때 엠티를 가면서 몇몇 여자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나일강의 소녀 보고나서 고고학자 되려고 했단다"라고 실토를 했더니, 역시나 한 만화 했었을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정말 유치하긴 유치했구나, 너도". (실은, 누가 물어보면 외교적인 언사로 "슐리이만의 트로이 발굴기 읽고 고고학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고 뻥을 치곤 한다^^. 실제로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슐리이만과 하워드 카터는 기본이고, 아서 에반스나 페트리 같은 고고학자들의 발굴기를 열심히 읽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요게 애장판이라는데 어째 표지가 멋이 없어진...
얼마전에 만화가게에서 당시의 추억을 고스란히 떠올려주는 작품을 만났으니, 바로 이것! 시노하라 치에의 '하늘은 붉은강가'라는 만화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판타스틱 러버'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먼저 나왔었다는데, 다소 문학적이면서도 만화 이름으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하늘은 붉은 강가'라는 원 제목이 훨씬 좋다는 생각.
한 소녀가 고대의 세계로 흘러들어간다...물론, 멋진 왕(혹은 왕자)이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 '나일강의 소녀'는 고고학에 관심 많은 영국인 소녀 '캐롤 리드'가 고대 이집트 18왕조의 '멤피스'왕 시대로 흘러간다는 줄거리(여기서 '멤피스'는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인 미국의 도시 이름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지명임). '멤피스'라는 왕은 18왕조, 그리고 '18세'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투탕카멘왕을 모델로 한 거죠. 1997년에 도쿄 기노쿠니야 서점에 갔다가 이 만화들의 원전을 봤는데, '캬로루'(캐롤)라고 쓰여진 일어 대사들이 참으로 고풍스럽더군요^^
'하늘은 붉은 강가'는 '나일강의 소녀'의 히타이트판이다. 주인공은 일본 소녀 '유리'로 바뀌었는데, 16세 소녀라는 설정도 똑같고, 주술('나일강'에서는 여왕 아이시스의 주술, '하늘은...'에서는 역시 왕비 나키아의 주술)에 의해 고대 세계로 들어오게 되는 점도 똑같다. 배경이 '히타이트'로 바뀐 것은, 아마도 이집트라는 소재를 그동안 만화에서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은 바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거의 비슷한 줄거리. 앞서 '캐롤'은 현대적인 지식을 가진 여성이지만 일본인들의 '서양 부러움증'을 여실히 반영하듯 '금발의 푸른눈'으로 그려졌다. 반면 이번에는 일본인이 주인공이 되면서(주체성의 회복?) 동시에 '여성전사'로 그려지는 것이 발전이라면 발전.
작품의 '질'이나 수준은 따지지 마시고, 그냥 재미있게 시간때우기로 만화를 봐야겠다...거나, 아니면 딸기처럼 정신못차리고 나이 서른이 넘도록 고대로의 여행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들이라면 재미 넘치게 볼 만 하다. 특히 생긴 것은 공주같지 않으나 공주병의 소질이 있는 사람들, '꽃보다 남자' 즐겁게 보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신나게 읽을 수 있다. '나일강'에 비해 그림이 이쁘다는 것도 무시못할 장점.
그런데 딸기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동광서적에서 80년대 중반에 '에드워드 사이트'라는 영국 작가의 이름으로 '나일강의 소녀'라는 제목의 소설이 출간된 적 있었는데, 만화와 같은 내용이다. 영국인의 소설을 일본에서 만화로 만들고, 그걸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해적판으로 출간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출판사들의 수작에 의해 일본인 저자의 이름이 가려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나일강'과 '하늘은'으로 인해 촉발된 '해적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기로 했다.
다음은 딸기가 수집하고 짜깁기한, 옛날 옛적 그 만화들의 원제와 작가 이름임.
1. '귀족의 딸 세르지아'. 원제 風と木の詩(바람과 나무의 시). 竹宮惠子(타케미야 케이코)작.
2. 이름도 반가운 '귀공녀 코린느'. 원제 伯爵令孃(백작영양). 細川知榮子(호소카와 치에코) 작. '귀족의 딸 세르지아'와 똑같은 방식의 작명법(作名法)을 엿볼 수 있다.
3. 이거 이거, 딸기랑 살구랑 정말 열심히 봤던 건데...완간되지 못하고 중간에 절판됐던 기억이 새록새록...'금빛깃발의 이름으로'.
원제는 風のゆくえ(바람의 행방), 粕谷紀子(카스야 노리코) 작. 우리나라에서는 '권소정'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똑같은 이름의 만화가가 그린 '덩쿨숲의 이야기'라는 환타지 만화도 있었다.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사료됨.
4. 이것 또한 들어본 이들이 많을 것이다. '꿈꾸는 알핀로제'. 원제 アルペンロ-ゼ(알펜로제). 赤石路代(아카이시 미치요) 작.
5. 이건 보지는 못하고, 친한 친구한테서 이야기로 전해들으면서 무서워 벌벌 떨었던 기억이 나는 만화...드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만화였던 듯. '꿈속의 신부'라는 만화인데, 원제는 惡魔の花嫁(데이모스의 신부). あしべゆうほ(아시베 유우호) 작. (얼마전에 복간됐길래 빌려서 봤더니...으스스...변태들...)
6. 소년중앙에 연재됐었죠. '나나와 리리'- 원제는 똑같이 ナナとリリ(나나와 리리). 里中滿智子(사토나카 마치코) 작.
7. 문제의 작품! 이집트-히타이트-아시리아-누비아 일대를 오가는 그레이트 판타스틱 러브 로망... 위에서 구구절절이 수다를 떨었던 '나일강의 소녀', '나일강의 사랑', '나일강의 여신', '나일강이여 영원히'. 원제는 王家の紋章(왕가의 문장)이고, 細川智榮子(호소카와 치에코)의 작품이다.
8. '남녀공학'(뒤에 '프렌드 프렌드'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됐었음) 원제 生徒諸君(생도제군), 庄司陽子(쇼지 요우코) 작.
9. 이 이름이 나오면 또한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上原きみこ(우에하라 기미코)-당시 '캔디캔디'의 작가 이가라시 유미코와 함께, 국내 해적판들 중에서 극히 드물게 일본인 원저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던 것이 바로 우에하라 기미코의 작품들이었다. '아사와 레도왕자'(배경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어져서 나왔다--;; 원제는 炎のロマンス; 불꽃의 로망스), '롯데롯데'(원제는 ロリィの靑春 ; 로리의 청춘) , 그리고 '나의 청춘 샤롯데'도 아마 이 작가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사랑 마리벨'(원제 마리벨)도 이 사람의 작품. あいつの四季(그녀석의 사계절)은 '청춘 캠퍼스'라는 한국적인 이름으로, ごきげん チャ-ミィ(안녕 챠미)는 '푸른 눈의 챠미'로 번역됐었다.
10. '녹색의 여왕' 우습게도 원제는 ブラッディ·マリィ(블러디 마리) 인데, '붉은 여왕'이 어떻게 '녹색의 여왕'이 됐을까^^. 枾崎普美(카키자키 후미) 작.
11. 역시나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 '에덴이여 영원히'. 이집트가 배경인데 여주인공은 '헬렌' 그리고 '소피아'(루피아였나?)이라는 서양식 이름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역시나 무쟈게 재밌게 봤었는데...두 왕자의 이름이 '라메스'(람세스)와 '맨카우라'였었죠. 모두 이집트의 유명한 왕 이름인데, 쩝...제목에 도대체 왜 '에덴'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차례에 걸친 전생과 현생의 악연을 잇는 빼어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 해적판에서는 '유나래'라는 작가 이름으로 나왔었다. '김영숙' '정영숙'보다는 그래도 궁리를 좀 해서 작가 이름을 정한 것일까. 원제는 海のオ-ロラ(바다의 오로라), 里中滿智子(사토나카 마치코) 작.
12. . 원제 역시 風と共に去りぬ(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津雲むつみ(츠쿠모 무츠미) 작.
아마 이 만화 봤던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걸요^^ 그치만 딸기는 국민학교 6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이 책을 전질 갖고 있었던 관계로 다 외울 때까지 봤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장면장면, 배우들 얼굴 생김과 옷차림까지 모두 똑같이 그려놓은 신기한 만화.
13. 이 만화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설명이 필요 없는 불후의 명작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잘즈' '한스 악셀 폰 페르센' 이 이름 오죽하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池田理代子(이케다 리요코)의 작품인데, 역시나 동광서적에서 '마리 스테판바이크'라는 작가의 이름으로 동명의 소설을 출간했었다.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 중에는 女帝エカテリ-ナ(여제 에카테리나)라는 것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백야의 흑장미'라는 괴상하고도 신기한 제목으로 나왔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올훼스의 창'...
14 '백작의 딸 헨젤'. 원제는 ジョ-ジィ!(죠지), 캔디의 작가 이가라시 유미코가 그렸죠.
15. '백조'와 '흑조'는 모두 원제가 SWAN. 有吉京子(아리요시 쿄우코) 작.
16. 제목을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이 만화 혹시 아십니까. '삐삐 삐삐'. 상당히 귀여운 그림에, 딸기가 즐겁게 봤던 작품인 것만은 기억나는데...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음. 원제는 ビビッちゃう!(겁나잖아)이고, 牧野和子(마키노 카즈코) 원작.
17. 만화방 깨나 들락거렸던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이름, '빙상의 하얀날개', '청춘의 하얀날개', '사랑의 하얀날개'- 원제는 靑春白書(청춘백서), 역시 '롯데롯데'의 우에하라 기미코 작품. 우에하라의 작품들은 '김영숙'이라는 유령 작가 이름으로 만화방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었죠. 같은 작가의 舞子の詩(마이코의 시)는 '사랑의 프리마돈나'라는 이름으로 나왔었고, 이 만화 뒤에 '엘레나의 붉은 꽃'이라는 단편이 실려있었다. 본 작품보다도, 신화적인 모티브를 가진 '엘레나의 붉은 꽃'이 더 강하게 머리에 남아 있다.
18. 이것 또한 고전의 목록에 이름을 넣을 만 하다. '사랑의 아랑훼스'. 원제는 똑같이 愛のアランフェス(사랑의 아랑훼스), まきむら さとる(마키무라 사토루) 작.
19. '소문난 아가씨'와 '소문난 아이 상희'는 모두 藤原榮子(후지와라 에이코)의 うわさの姬子(소문의 히메코)를 번역한 것. '소문난 아이 상희'라는 제목으로 된 것을 봤었는데...
20. '신비한 나라의 천일야'. 원제도 똑같이 不思議の國の千一夜(신비한 나라의 천일야). 소네 마사코 작. 딸만 일곱인 나라의 왕이, 7남1녀의 막내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뒤 '아들을 낳으라'고 했더니 덜커덕 딸을 낳아놓았다...당황한 왕비는, 어린 아기를 왕자로 꾸며 아들로 속인다는 황당한 줄거리, 그러나 너무나 매혹적인 그림과 유니콘, 용 등 온갖 생물과 마법이 넘쳐나는 볼수록 신기하고 아름다운 만화. 일본 강담사에서 추억의 고전으로 다시 출간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줄거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 안되는 만화다.
21. '유리가면', '흑나비' '천의 얼굴을 가진 소녀' 모두 원작은 ガラスの假面(유리가면). 美內すずえ(미우치 스즈에) 작.
22.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지금껏 베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만화, '유리의 성' 아니던가. 원제는 ガラスの城(유리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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