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휘슬블로우어- 관료사회의 벽을 깨는 영웅들

딸기21 2005. 6. 4.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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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사의 수수께끼였던 워터게이트 사건 제보자 `딥 스로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대형 비리 혹은 의혹의 내부제보자들, 이른바 `휘슬블로우어(whistleblower)'들에게 다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딥 스로트로 밝혀진 마크 펠트 전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처럼 민감한 사안에 대한 정보에 밀착돼 있으면서, 문제점을 인식하고 외부에 공개-비공개적으로 유출시키는 이들이 바로 휘슬블로우어들이다. 펠트처럼 몇십년간 완전히 신원을 감추지 않는 한 이들은 조직의 박해와 감시를 벗어날 수 없다. 해직, 소송, 투옥 등 개인사는 수난으로 점철되는 운명을 겪지만 역사가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영웅들인 셈이다.

'펜타곤 페이퍼'를 남긴 다니엘 엘스버그

1960년대 말 매서추세츠 공과대학(MIT) 국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엘스버그(74)는 당시 국방부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제2차대전 때부터 68년5월까지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를 만들고 있었다. 서류 작성에 참여하면서 그는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됐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사태에 개입하고 있었고, 백악관은 1954년 이미 북베트남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국민들에게 개입 필요성을 설득하기 훨씬 이전부터 정부는 전쟁 계획을 입안, 실행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엘스버그는 3000쪽이 넘는 이 서류를 뉴욕타임스(NYT)에 넘겼고, 신문은 1971년6월 연방정부 기밀서류였던 이 문서를 바탕으로 연재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연방법원에 이 서류 내용을 공표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NYT는 라이벌인 워싱턴포스트와 연합해 법정투쟁을 벌여 승리를 얻어냈다.

엘스버그가 누출시킨 이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국방부) 페이퍼'는 미국 내 반전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다.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은 엘스버그를 매도하려 불법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했는데, 이런 사실들은 후일 워터게이트 청문회에서 낱낱이 밝혀졌다.

이스라엘 핵무기 폭로한 모르데차이 바누누

1986년10월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는 섬유공장으로 위장돼 있던 이스라엘 디모나 핵무기 생산기지의 생생한 사진들을 실었다. `아랍위협론'을 유포해오던 이스라엘의 위선에 치명타를 날리는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이 사진들은 디모나 핵연구소에서 일하다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이유로 해고된 당시 32세의 젊은 기술자 바누누(51)가 제공한 것이었다. 유대 패권주의에 환멸을 느낀 그의 폭로로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돚제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바누누는 휘슬블로우어가 겪어야 하는 참혹한 운명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된 때부터 지난해 4월 출감될 때까지 바누누는 18년간을 감옥에 있었고, 그 중 12년은 독방에서 보냈다. 지난해 형기를 마치고 나온 뒤에도 당국의 감시는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우파 언론들은 그를 매국노로 몰아붙이며 극우단체가 암살할 수 있게끔 고의적으로 행방을 보도하고 있다. 한 일간지 설문조사에서 이스라엘 국민의 3분의 1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응답했을 정도. 국제인권단체들의 구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백발이 되어버린 바누누의 고난은 끝나지 않고 있다.

담배와의 전쟁' 이끌어낸 제프리 와이갠드

미국의 3대 담배회사 중 하나인 브라운 앤드 윌리엄슨의 연구개발 책임 부사장이었던 와이갠드(63)는 1993년 회사가 매출을 늘릴 목적으로 담배에 암모니아 화합물을 첨가, 중독성을 높이는 것에 반대하다가 해고당했다. 와이갠드는 CBS방송 보도프로그램 `60분'에 출연해 이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했지만 이번엔 CBS 내에서 경영진의 압력으로 프로그램 방영이 무산됐다. 프로듀서 로엘 버그만은 이번 `딥스로트' 신원공개 특종을 거둔 주간지 `배니티 페어'에 와이갠드의 증언과 자신의 취재내용을 제보,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됐다.

영화(`인사이드')로도 만들어진 이들의 이야기는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과 금연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기업 비리를 드러낸 여성들

시사주간 타임지는 지난 2002년 파산한 대기업 엔론과 월드컴, 그리고 연방수사국(FBI)의 비리를 폭로한 여성 휘슬블로우어 3명을 나란히 `올해의 인물'에 선정했다. 희대의 회계부정을 저지른 월드컴사의 내부감사역이었던 신시아 쿠퍼(41)는 회사 파산 전 이사회에 회계부정 사실을 알려 경고했으며, 셰런 왓킨스(46)는 엔론 회장에게 경고쪽지를 보내 회사의 난맥상을 지적한뒤 사임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내부 비리를 외부에 알린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여론은 이들을 환영했다.

테러와의 전쟁에 반기를 든 제보자들

FBI 전직 요원 콜린 로울리(51)는 미 정보요원들이 2001년 9.11 이전 알카에다 테러정보를 입수했었으며 상부에 수사 확대를 요청했다가 윗선에서 묵살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 의회가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청문회를 여는 등 파장이 일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곤욕을 치렀다.

영국에서는 정보통신본부 통역요원이던 캐서린 건이라는 여성이 "미-영 정보당국이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외교관들을 도청했다"고 폭로해 토니 블레어 정권을 궁지에 몰기도 했다.

어째서 휘슬블로우어인가

조직의 비밀을 조직 밖에 알린 이들은 필연적으로 수난을 겪게 된다. 동료들의 증오심, 배신자라는 오명, 사법당국의 조사, 법정이나 청문회에서의 증언, 심지어 투옥까지, 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초는 너무나 크다.

그러나 휘슬블로우어가 필요하다는 점, 정확히 말하면 `휘슬블로우어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기구나 기업조직이 관료화, 비대화될수록 정보 통제는 많아진다. 정보독점이 극심한 상황에서 내부자의 제보가 없으면 사실상 국가, 기업에 대한 사회적 감시는 불가능하다. 정치무관심, 윤리불감증 등 `우민화'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관료화된 사회의 균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휘슬블로우어들이다.

지난해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벌어진 미군의 포로학대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미군 헌병 조지프 다비라는 내부고발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같은 예외국가를 제외하면 선진국들은 대부분 내부 제보자의 필요성을 인정, 신원보호 등을 위한 `내부고발자보호법'을 마련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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