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스티븐 로런스와 조지 짐머먼 사건

딸기21 2013. 7. 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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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백 인종차별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영국의 사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미국에 비해 들을 기회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몇해 전 인종주의에 대한 책을 번역하다 스티븐 로런스 사건을 접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영국에서는 크게 논란거리가 됐고 정부 차원의 조사까지 벌어졌던 사건이더군요.


내용은... 많이 듣던 스토리입니다. 억울하게 살해된 흑인 소년, 하지만 백인 피의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는.


스티븐 로런스 Stephen Lawrence (아래 사진)는 18세의 흑인 학생이었는데, 1993년 4월 22일 저녁 런던 남부 엘덤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백인 젊은이 5명에게 흉기로 찔려 죽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들을 모두 붙잡아 놓고도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기소가 됐지만 2명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새로운 DNA 증거들에 따라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2명은.. 사건 발생 19년 만인 지난해 1월에야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 유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한스러웠을까요.


이 사건을 놓고 파장이 계속되자 정부도 조사를 하기는 했습니다. 1999년 윌리엄 맥퍼슨 William Macpherson 이 이끄는 ‘맥퍼슨 위원회’가 만들어져, 당시의 사건과 이후의 수사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위원회는 로런스 살인사건이 철저하게 인종적인 동기에 의해 이뤄진 범행이었으며, 소년은 단순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됐음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경찰의 수사·불기소 과정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이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맥퍼슨은 보고서에서 런던 경찰청을 ‘제도적인 인종주의자 institutionally racist’라 규정하면서 “이 사건은 현대 영국의 형사 정의의 역사에 남을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제도적 인종주의'라는 어려운 용어는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꼭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영국 경찰이 로런스 사건 당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주변을 뒷조사했던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지요. 지난달 말 가디언 보도였습니다. 피터 프랜시스라는 비밀경찰이 로런스의 친척과 친구들을 감시하고 이들에게서 오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는 겁니다. 프랜시스의 뒤늦은 '고백'을 통해 드러난 사실입니다.
사건이 있고 20년이 지나서 입을 연 프랜시스는 당시 로런스의 주변 사람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스티븐 로런스 캠페인'에 잠입해 이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정보를 수집해오라는 지시를 받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캠페인'은 로런스 사건에 대한 축소수사에 항의하고 공정한 조사를 촉구하는 그룹이었습니다. 


이 폭로 전부터도 로런스 사건의 문제점은 계속 지적돼 왔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지난달 재수사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답니다. 


[가디언] Stephen Lawrence inquiry possible, says David Cameron




이 사건이 다시 생각난 것은, 미국에서 어제 벌어진 '짐머먼 평결' 때문입니다. 


짐머맨이라는 백인 남성은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을 사살했는데 어제 재판에서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 평결을 받았습니다. 

이 재판으로 미국이 들썩이고 있네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트위터에는 관련된 멘션이 100만건 넘게 올라왔다 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시위대에 '진정하라'고 호소했고, 공화당은 외려 오바마가 이 사건을 '정치화'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다'고 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  


생각난 김에, 영국의 인종 관련 사건 하나 더 소개합니다. 이태 전 영국 소요 때 언론에 많이 나왔던 브릭스턴 폭동 Brixton riots 입니다. 


런던의 브릭스턴은 아프리카-카리브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주거환경이 열악하고 실업률이 높은데다 범죄가 많았다고 합니다. 1981년 4월 초 런던 경찰청은 ‘늪지 작전 81 Operation Swamp 81’이라는 이름으로 브릭스턴에서 범죄 소탕작전을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범죄자라고 단순히 의심만 되는 상황이어도 시민들을 검문검색할 수 있게 한 이른바의심법 sus law을 남용, 닷새 동안 주민 943명을 검문하고 118명을 체포했으며 그 중 75명을 기소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주민 5000여명이 폭동을 일으켜, 경찰 279명과 시민 45명이 다쳤습니다. 차량 100대 이상이 불타고 건물 150여채가 손상을 입었으며 30채는 불탔습니다. 폭동 뒤 82명이 체포됐습니다.  잡아 가두고, 가두는데 항의하면 폭도라고 잡아 가두고. 



결국 다시 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레슬리 스카먼 Leslie Scarman 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는 그 해 11월에 이른바 ‘스카먼 보고서’로 알려진 조사보고서를 발표합니다. 

보고서는 브릭스턴 폭동을 ‘명백히 인종차별적으로 진행된 검문검색과 체포 때문에 일어난 우발적인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이 폭력적인 저항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보고서는 인종적인 불리함 때문에 브릭스턴이 쇠퇴를 겪어왔음을 지적하면서 ‘인종적인 불리함이 광범위하고 피할 수 없는 질병이 되어 우리 사회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되는 것을 막으려면 시급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보고서만 나오면 뭐하나 싶지만... 그래도 나오는 게 중요한 거죠 -_- 

미국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로드니 킹 사건이 있었죠. 그 전에는 민권운동에 한 획을 그은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요. 인권운동가들은 짐머맨 사건도 '민권 재판'의 하나로 다뤄야 한다고 요구하는 모양입니다.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 사회는 민권운동 이후 반세기가 지나 벌어진 이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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