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이 여성, 로자 파크스

딸기21 2011. 12. 1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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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백화점에서 일을 마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Lee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는 여느 날처럼 버스를 타고 뒷자리로 갔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 도시들에서는 버스에서 백인이 앞쪽에 타고 흑인은 뒤쪽에 타야 했습니다. 버스가 만원일 때에는 흑인은 무조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내려야 했습니다. 

1954년 연방대법원이 흑백 분리교육은 부당하다고 판결하는 등 민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점차 나아가고는 있었지만 미국 전역, 특히 남부에서는 분리정책이 공개적으로 실시됐습니다. 파크스는 1930년대부터 남편 레이먼드와 함께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해온 민권운동가였습니다. 파크스와 동료들은 인도의 독립을 이끈 모한다스 간디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깊이 감화돼 있기도 했고요.

1955년의 로자 파크스. 옆쪽에 보이는 인물이 마틴 루서 킹 목사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 퍼왔어요. 로자 파크스의 눈이 참 예뻐요.


파크스가 '버스를 탄 날' 훨씬 이전에, 앨라배마 주 스코츠버러(Scottsboro)에서 1931년 흑인 청년 9명이 백인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을 검진한 의사는 성폭행이 없었다고 증언했지만 백인들로만 이뤄진 배심원들은 피고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12세 소년을 빼곤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듬해 연방대법원은 피고인들이 재판 과정에서 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며 판결을 번복했습니다. 이후 유죄판결과 번복이 반복되면서 스코츠버러 아이들 재판은 시민권과 관련한 유명한 논쟁으로 기록됐지요.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진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이랍니다.

파크스는 스코츠버러 소년들을 지지해온 인물이었습니다. 파크스는 이미 1940년대에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불복종 운동을 하다가 버스에서 추방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NAACP를 비롯한 흑인 민권운동 단체들도 공공시설에서의 분리정책에 조직적, 공개적으로 저항하기를 꺼렸습니다. 비폭력 저항의 형태를 띠더라도 자칫 백인들의 폭력적 저항에 부딪쳐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12월 1일 파크스는 분리정책에 따라 뒷자리로 갔지만 버스는 만원이 되었고, 운전기사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아예 버스에서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파크스가 앉아있던 자리는 원래 유색인종 자리였는데, 운전기사가 유색인종 좌석표지를 뒤로 밀고 파크스에게 양보를 요구한 겁니다. 파크스는 거절했고,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시 조례를 어긴 혐의였습니다.

애당초 유색인종 좌석이었기 때문에 파크스는 그날 저녁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버스 분리탑승으로 대표되는 흑인차별에 맞서 본격적인 싸움을 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파크스는 민권운동 동료들과 함께 그날 밤을 새워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3만5000장의 유인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보이콧 운동에 들어갔습니다.

두달 전이었나요.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로자 파크스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로자 파크스가 인기 검색어 목록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그러니까 버스 사건을 들여다보면, 파크스라는 어떤 평범한 흑인 여성이 어떤 상황에 격분해 용감하게 맞섰는데 그것이 우연찮게도 들불로 번진, 그런 상황은 아니었던 거죠. 파크스는 이미 20년 가량 흑인 민권운동에 참여해온 운동가였고,용감하면서도 현명한 싸움꾼이었고, 때가 무르익었음을 판단한 전략가였던 겁니다.

일요일인 12월 4일에는 몽고메리와 주변지역의 흑인 교회들이 보이콧에 동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파크스는 공공질서를 교란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파크스는 불공정한 법 자체를 심판대에 올려야 한다고 보고 항소를 결정했습니다. 인종분리 법에 정면 도전한 겁니다.

12월 5일 보이콧 운동을 마친 흑인들은 시온 교회에 모여 ‘몽고메리 진보협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의 회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당시만 해도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던 26세의 젊은 흑인 목사였습니다. 바로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Dexter Avenue Baptist Church) 목사였던 마틴 루서 킹이었습니다.

파크스와 킹 목사의 주도 하에 그 후 13개월 동안 몽고메리에서 버스 보이콧 시위가 계속됐습니다. 1만7000명이 넘는 흑인들이 분리정책 폐지를 요구하며 버스 이용을 거부했습니다. 대부분 직장까지 걸어 다녔고, 승용차를 가진 극소수의 흑인들은 동료들을 직장까지 실어 날랐습니다.

파크스가 탔던, 바로 그 버스! 지금은 이렇게 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로자 파크스 기념관이나 흑인 민권운동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헨리 포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


흑인들의 비폭력 보이콧 시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국적으로 민권운동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이 와중에 킹 목사는 체포됐고, 그의 집은 폭탄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들에 흑백 분리를 폐기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보이콧 운동은 이로써 1956년 12월 20일 막을 내렸습니다.

재단사로 일하던 파크스는 이 싸움을 하는 사이 백화점 일자리를 잃었고, 남편도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파크스와 그 가족은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받다가 1957년 디트로이트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이후 민주당 의원 존 코니어스(John Conyers)의 특별 보좌관이 됐고 NAACP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미국 전역을 돌며 보이콧 운동의 의미와 인종 분리의 부당성을 설파하는 일을 했습니다.

파크스는 1960년대를 휩쓴 민권운동의 물결 속에서도 단연 빛나는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미 의회로부터 ‘민권의 퍼스트레이디’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1987년에는 젊은이들을 돕고 민권에 대한 교육을 하기 위해 자기계발을 위한 로자 앤드 레이몬드 파크스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남부기독교도지도회의(SCLC)는 매년 로자 파크스 자유상을 시상하고 있습니다.

파크스는 92세를 일기로 2005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으며 의사당 옆 캐피털 힐(Capitol Hill)에 묻혔습니다. 캐피톨 힐에 안장된 31명의 미국인 중 흑인은 파크스가 처음이었고, 여성 또한 그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는 4만 명 넘는 시민들이 찾아와 ‘민권운동의 어머니’를 기렸습니다.

2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추도 예배에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배우 시슬리 타이슨(Cicely Tyson), 흑인 여성 민권운동의 대모 도로시 하이트(Dorothy Height. 1912-2010. 이 여성 역시 미국 흑인민권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죠. 1929년 뉴욕의 명문대인 바나드 대학(Barnard College)에 합격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습니다. 뉴욕 대를 거쳐 뉴욕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전국흑인여성협회(NCNW)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평생을 민권운동에 바쳤습니다. 1957년부터 97년까지 무려 40년간 NCNW 회장으로 흑인 여성운동을 주도했고요. 2004년 바나드 대학은 하이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파크스의 어린 시절 친구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끌었던 조니 카(Johnnie Carr) 등이 참석해 추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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