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유혈사태 끊이지 않는 나이지리아

딸기21 2010. 3. 2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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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에서 얼마전 또다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이달초 중부 플라토주(州) 조스에서 무슬림 유목민들이 기독교도 주민 500명 이상을 살해한 것이다. 분쟁과 학살이 일어날 때에 으레 그렇듯이 희생된 이들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외신 사진으로 전해진 ‘학살의 현장’은 끔찍했다. 곳곳에 널린 시신들을 간신히 수습한 주민들은 황무지같은 붉은 땅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주검들을 한데 모아두었다.

우마루 무사 야라두아 대통령은 지난해말 심장병 수술을 받은 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불신임 위기에 놓여 있다. 차기 집권자로 유력시되는 굿럭 조너선 부통령은 즉시 조스에 보안병력을 투입하고 공격자들을 색출·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한두번이 아니거니와, 나이지리아 연방정부에 유혈충돌을 금지시킬 힘이 있다고 믿는 이들도 거의 없다.



해마다 수백명씩 ‘집단학살’

근 10년 새 나이지리아 북부와 중부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2000년 북부 카두나주가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도입하자 이에 반대하는 비무슬림들이 시위를 벌여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2002년에는 ‘미스 나이지리아’에 선정된 여성이 미스월드 선발대회에 출전하게 되자, 무슬림들이 ‘방탕한 서구문화 추종’에 반대하며 시위를 해 최소 216명이 숨졌다.


2006년 덴마크에서 촉발된 ‘무하마드 모독 만평’ 파문 때 가장 극심한 유혈사태가 난 곳도 유럽이나 중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가 아닌 나이지리아였다. 북부 이슬람 지역인 마이두구리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다시 서로를 공격해 150여명이 숨진 것이다. 특히 조스는 두 종교간 충돌이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다. 2001년 다시 기독교도와 무슬림이 부딪쳐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2008년 지방선거 때에도 7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들어서도 지난 1월에 이미 한 차례 충돌이 일어나 수백명이 숨진 바 있다.


연방정부가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7월 정부 보안군이 북부 바우치에서 이슬람 극단조직 ‘보코하람’에 대한 진압작전을 벌였다. ‘나이지리아판 알카에다’, ‘아프리카의 자생적 알카에다’로 알려진 보코 하람은 하우사(Hausa)족 언어로 ‘서구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으로, 2003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무장조직이다. 보코 하람이 서구식 교육과 문화·과학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경찰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자 정부군은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800명 이상이 숨졌다.


나이지리아는 수도 아부자가 속한 특별령 외에 36개 주로 이뤄진 연방국가다. 공화국 역사는 우리보다 조금 늦은 1960년 시작됐으니 그리 길지 않지만 몹시 꼬여있어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 나라를 지배한 오랜 군사정권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독재자였던 사니 아바차의 통치는 가혹했다. 또한 몹시 한심했다. 면적 92만㎢의 넓은 영토,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1억5000만명의 인구, 세계 10위의 석유매장량(362억 배럴), 북쪽의 농지와 남쪽의 유전, 서부의 해안을 가진 서아프리카의 중심국가로서 ‘지도자’만 잘 만났더라면 충분히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 나라였다. 하지만 오랜 독재정권과 부패 때문에 발전은 더뎠다.

다행인 점이라면 아바차 정권이 끝난 뒤 1995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 지도자 출신으로 한차례 대통령을 지낸 올루세군 오바산조는 군복을 벗고 1999년 민주선거를 거쳐 다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첫 임기 동안에는 부패, 정실주의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으나 두번째 임기에는 사명감 있는 각료들을 발탁해 본격 개혁에 착수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었던 로버트 게스트는 “오바산조 정부의 경제개혁을 책임졌던 응고지 오콘조 이웰라 전 재무장관이 재임 시절 공항에서 일반인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고 적은 바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 개발경제학자인 폴 콜리어도 보기드문 여성 재무관료였던 응고지 오콘조 전 장관의 개혁을 칭찬했을 정도다.


영국 선교사들이 심어놓은 ‘종교 갈등’


어쨌든 나이지리아는 내전 없이 군사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옮겨갔다. 2007년 야라두아가 역시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 취임하면서 다시 국제사회의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이지리아의 여러 분규는 그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진통의 하나였다. 갈등과 분규를 가혹하게 내리누르던 군부독재정권이 없어지자 곪은 상처들이 터져나온 것이다.


특히
나이지리아에서 지역, 부족, 종교는 하나의 전선으로 이어져 있다. 사실 이 나라의 부패와 정실주의는 석유자원 때문에 더욱 극심해진 측면이 많다. 현재의 나이지리아 영토를 지배해온 것은 전통적으로 북부 주들을 다스려온 무슬림 엘리트 부족집단들이었다. 


그런데 석유를 가진 것은 니제르강 연안 ‘니제르 델타’를 낀 남부 주들이다. 종족(그리고 지역, 종교집단) 간의 유대감은 ‘석유를 쟁탈하기 위한 연대의식’으로 바뀌었다. 자원을 갖는 것은 내 소속집단에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 그래서 더 많은 표를 확보하는 것이다. 표를 많이 얻어 집권하면, 자원에 대한 처분권을 가질 수 있다. 이 악순환이 민주주의를 좀먹고 부패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된다.

지난 연말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행 항공기 테러미수사건 용의자가 나이지리아 부유층 집안 출신 젊은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북부 세력은 민주주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서구 탓으로 돌리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남부의 석유자원을 시기하며 이슬람으로 상실감을 메우려하는 북부 지배층은 무슬림 주민들의 기독교도 학살을 묵인·조장하고, 기독교 세력은 그에 보복한다며 역시 학살을 저지르기 일쑤다.

갈등의 씨앗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 영국은 오늘날의 나이지리아 국경선을 멋대로 획정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북부 이슬람 지역 지배층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국 선교사들이 남부에서만 선교활동을 하게 했다. 그 결과 남부에 식민지형 교육사업이 진행되면서 여러 대학들이 생겼다. 1950년이 되자 남부에는 대학 졸업생이 수천 명에 달했지만 북부에는 단 1명뿐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공직은 모두 남부인이 차지하게 됐다. 


독립이 가까워오자 북부 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끼고 ‘북부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 후 나이지리아는 거의 북부 이슬람 군부 실력자들에 의해 통치됐다. 남부 사람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차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이 해묵은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풀릴지, 거대 개도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이지리아가 진통을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