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공은 둥글대두

지네딘 지단에 대한 조금 긴 글

딸기21 2006. 7. 11. 17:34
728x90

지네딘 지단을 왜 좋아하느냐고요.


축구팬에게 그런 질문은 우문(愚問)입니다. 지단을 축구를 잘 하니까요. 누가 뭐래도, 펠레 마라도나 다음은 지단입니다. 지난 10년은 지단의 시대였습니다.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울린 지단의 두 차례 헤딩골, 01-02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보여준 환상적인 발리슛, 중원을 완전히 장악해 게임을 ‘지단의 경기’로 만들어버리는 그 지휘력. 지단의 플레이를 본 사람이라면 ‘중원의 지휘자’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지단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축구를 잘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유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는, 다소 정치적인 이유를 들고 싶습니다. 몇해전 지단은 스페인 마드리드 주정부가 주는 "Function for the Recongition of Tolerance" 상을 받았습니다. 수상 이유는 “인종주의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모범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상식을 했던 마드리드 주지사의 말 중에 인상적이었던 구절이 있어 남겨뒀었는데요. “We need more zidanes in this world.” 이 세상에 지단이 많아진다면 축구팬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의 피해를 입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일이 되겠지요. 

지단의 ‘박치기’만 보고서 많은 이들이 실망한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 국내 포털사이트에는 ‘지단 성질 나쁘다’는 식의 악플들이 마구마구 달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단이 간혹 예민한 성격 때문에 경기장에서 폭행을 저지르곤 했다는데 물론 그런 적이 있습니다만, 지단은 결코! 상습적으로 반칙을 저지르는 선수가 아닙니다. 이탈리아 선수들이 어떻게 플레이를 하는지, 아마 축구팬이라면 알 거예요.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벌어진 프랑스 대표팀의 지네딘 지단과 이탈리아 대표팀 마르코 마테라치의 `충돌'이 유럽에서 다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지단 측이 이른 시일 내 입장을 정리해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무엇이 지단을 화나게 했나" 하는 것이 초유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요.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 지단이 `박치기'를 하게 만들었던 마테라치의 발언이 인종차별과 관련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 결승전 해프닝보다 더 큰 파문이 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단의 에이전트인 알렝 밀리아키오는 10일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지단은 마테라치가 매우 심한 말을 했다고 했다"면서 "그러나 아직은 마테라치 발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밀리아키오는 "지단은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다음 주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해 곧 입장을 발표할 것임을 시사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간 지단은 11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해 팬들의 환호를 받았지만, 은퇴 경기를 레드카드로 마감한 것 때문에 몹시 우울한 상태라고 하는군요. 프랑스 언론과 축구팬들은 월드컵 마지막 2주간 지단의 환상적인 플레이가 되살아나 프랑스팀이 선전을 하자 지단에 열광적인 성원을 보냈었지요. 지단 열풍을 가리키는 '지다노마니아(Zidanomania)'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테라치의 `도발'과 지단의 갑작스런 행동, 뒤이은 퇴장은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사실입니다.

지단 쪽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내용을 토대로, 유럽 언론들은 마테라치 발언을 추측한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프랑스 언론들은 북아프리카 알제리 이민자인 지단의 부모 등 가족들을 비난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몇몇 언론들은 마테라치가 지단에게 "더러운 테러리스트"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베르베르'라는 말로 지단을 자극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고요. 베르베르족은 북아프리카 원주민입니다. 아무튼 이런 보도들이 이어지자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인종차별 반대운동 단체 `SOS라시즘' 등은 마테라치 발언을 문제 삼을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해자'인 마테라치는 발언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11일 로마에서 가진 이탈리아 ANSA통신 인터뷰에서 마테라치는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면서 "나는 그런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다"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마테라치의 에이전트는 "마테라치는 좋은 사람이며 나쁜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고, 마테라치의 아버지는 "내 아들이야말로 이번 파문의 희생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직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요

흑인을 비롯해 이주민 출신 축구선수들이 많은 유럽에서 축구 경기를 둘러싼 인종차별은 극도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테라치의 발언이 인종차별적인 것으로 드러나면 UEFA가 마테라치를 중징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몇해전 프랑스의 흑인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가 네덜란드에서 유럽선수권대회(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하는 도중 팬들이 인종차별적인 구호를 외치자 UEFA는 해당 경기장을 소유한 클럽 측에 `경기장 폐쇄'를 경고했었습니다. 팬들의 인종차별 구호 등에 대해 UEFA측은 경기 몰수, 경기장 폐쇄 등으로 강력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스페인-프랑스전에서 스페인 팬들이 프랑스 ‘흑인선수들’을 겨냥한 욕설을 해서 프랑스 대표팀 도메네크 감독이 불만을 나타냈었지요. 그 이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월드컵 중반부터 경기 시작 전에 각 팀 주장이 인종주의 반대 현수막 앞에서 선서를 하는 모습이 TV에 비쳤습니다. MBC 캐스터가 마치 그것이 한국-스위스전에서와 같은 ‘심판들의 인종차별’ 때문에 나온 조치인양 아전인수 격으로 해설하는 걸 보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지만요.

특히 지단은 명성을 바탕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캠페인 등에 적극 참여해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큽니다. 2002년 인종차별을 내건 프랑스 극우파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 대표가 대선 결선에 진출해서 프랑스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젊은 유권자들이 정치 무관심에 빠져 있는 동안 우파들의 표가 쏠린 것이었죠. 그때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젊은 유권자들의 결집을 촉구, 자크 시라크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한 것이 바로 지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프랑스 팬들은 지단을 펠레나 마라도나, 미셸 플라티니 같은 축구영웅들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루터킹 같은 평화주의자들과 비교하며 영웅시해왔다는 겁니다.

이런 ‘지단 영웅만들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물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뒤 프랑스 좌파 언론 리베라시옹은 축구팬들에게 `현실을 돌아볼 것'을 촉구했습니다. "다인종국가 프랑스는 삼색 깃발처럼 사회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 한달간 지단과 함께 꿈을 꾸었으니 이제는 시라크와 함께 깨어나야 한다". 지단 열풍과 논란 속에서, 갈수록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현실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번 월드컵 기간에도 르펜 같은 극우파들은 "대표팀에 흑인 선수가 많아 일체감이 안 느껴진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마테라치의 발언이 궁금하다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의 이미지를 구겨버린 것, 지단이 아쉽게도 레드카드로 마지막 경기를 마감하게 된 것, 이런 것들도 안타깝습니다만, 무하마드 알리가 미국에서 ‘권투선수 그 이상’이었던 것처럼 지단도 ‘축구선수 그 이상’이었기에, 계속해서 잔상이 머리 속에 남는군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