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얻어맞은 베를루스코니

딸기21 2009. 12. 23. 12:35
지난해 12월 15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방문했던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 이라크 기자가 던진 신발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 부시는 신발을 피했지만 문제의 기자는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아랍권에 큰 파장을 몰고 온 이른바 ‘신발열사’의 탄생이었다. 이 기자는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그로부터 만 1년이 지난 뒤, 다시 유명정치인이 봉변을 당했다. 스캔들과 문제성 발언들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지난 13일 밀라노의 한 광장에서 연설을 한 뒤 갑자기 날아온 조각상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베를루스코니는 코뼈와 이 2개가 부러졌고 입술이 찢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연말 일정은 모두 취소해야 했다. 덴마크 코펜하겐 유엔 기후회의 참석도 취소됐다. 총리에게 두오모 성당 모형 조각상을 던진 마시모 타르타글리아(42)는 폭행죄로 기소됐다. 그는 범죄 전력은 없으나 10년간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들이 공개 장소에서 공격을 당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암살이나 테러공격이 아닌 ‘망신을 주기 위한 공격’은 그 자체로 대중들의 정치행위다. 가장 흔한 것은 달걀세례다. 2001년 영국 부총리 존 프레스코트는 북웨일스를 방문했다가 달걀세례를 받았다. 프레스코트는 그 3년 전에도 한 시상식에서 얼음 세례를 받은 바 있었다. 한국에서도 정원식 전 총리가 1991년 학생들로부터 달걀세례를 받았다.


전직 복서 출신인 프레스코트는 달걀로 범벅이 된 뒤 자신을 공격한 시위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한국에서는 보수언론과 정권이 나서서 달걀 공격을 ‘패륜’으로 밀어붙여 공안탄압극을 연출했다는 점이 차이였다.

달걀, 파이, 신발... 모욕도 가지가지


2000년 캐나다의 장 크레티앵 당시 총리는 <빨강머리 앤>의 고향으로 유명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방문했다가 얼굴에 파이를 맞았다. 스스로 ‘파이 여단(Pie Brigade)’ 멤버라고 주장한 20대 청년이 파이를 집어던진 것.


부시가 신발공격을 받은 뒤 신발공격이 한때 유행을 하면서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도 그 피해자가 됐다. 지난 2월초 영국을 방문한 원자바오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연설을 하는데, 독일계 유학생이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며 신발을 던졌다. 신발은 연단 앞에 떨어져 원자바오에게는 닿지 않았다. 원자바오의 반응은 어땠을까. “저런 비열한 방법으로 중국과 영국의 관계를 훼손시킬 수 없다”면서 그 자리에서 질타했다고 한다. ‘서민 총리’, ‘자상한 할아버지’로 알려진 원자바오도 외국에서 일어난 모욕에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한 블로거는 이 사건 뒤 재미삼아 근자에 일어난 정치인 모욕 공격 통계를 올렸다. 미디어에 보도된 사건들만 가지고 집계한 이 통계에서 1위는 단연 일본이었다. 아시아 순방에 나설 때마다 과거사 문제로 항의를 받아온 일본 지도자들은 85년 이래 47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80년 이후 23차례, 인도는 주로 국경분쟁 문제로 86년 이후 7차례, 프랑스는 89년 이후 5차례 등이었다.


베를루스코니, 이번에도 버텨낼까

정치인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사유도 가지가지이고 그에 대한 정치인들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베를루스코니는 15일 지지자들에게 보낸 첫 ‘병상 메시지’에서 “사랑은 언제나 증오와 질투를 이긴다”며 특유의 사랑론을 펼쳤다. 그는 “내게 지지와 애정의 메시지를 보내준 모든 분에게 감사한다”며 “여러분이 차분하게 행복한 생활을 유지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한 정신병자의 공격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이탈리아 정치상황을 보면 파장이 간단치 않을 것 같다. 잇딴 섹스 스캔들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베를루스코니는 이혼소송과 탈세, 회계부정, 부패 재판으로 궁지에 몰렸다. 거기다가 근래에는 마피아 연루설까지 터져 나왔다.


베를루스코니는 잘 알려진 대로 유명 축구클럽 AC밀란의 구단주이고 언론재벌이다. 그가 소유한 메디아셋 산하 채널들은 전국 TV 시청률의 50%를 점하고 있다. 이 밖에도 광고·홍보회사 푸블리탈리아, 영화관 체인 메두사와 영화배급업체 펜타, 보험회사 메디올라눔과 금융회사 메디오방카 등을 갖고 있다. 모두 대중적 영향력이 큰 기업체들이다. 뿐만 아니라 동생 파올로는 중도우파 신문 일 지오르날레 소유주로서 이 신문을 통해 형의 정책을 옹호, 종종 비판을 받는다.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며 이혼소송을 제기한 아내 베로니카 라리오 여사도 유력 우파 신문 일 폴리오의 대주주다.


노 B 데이(No B Day)

베를루스코니의 언론제국은 합법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텔레비전 채널권을 사들이면서 탈세와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재판 과정에서 영국인 변호사에게 위증을 교사한 혐의까지 불거졌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는 총리를 비롯한 고위공직자 4명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을 주는 희한한 법안을 내놨다. 지난 10월 헌법재판소는 이 법에 ‘당연히’ 위헌결정을 내렸다. 위증을 한 변호사는 이미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베를루스코니도 밀라노 법정 출두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거기에 마피아 후원설이 겹쳤다. 마피아와 정치인들의 커넥션은 이탈리아 정계에서 잊을만 하면 튀어나오는 스캔들이다.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계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상원의원 재판에 전직 마피아 조직원이 증인으로 나왔다. 그는 “베를루스코니도 90년대에 마피아에 혜택을 주기로 하고 정치적 후원을 받았다는 얘기를 보스에게서 들었다”고 증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조직원이 언급한 ‘보스’는 폭탄테러로 유명한 코사 노스트라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마피아 거물 주세페 그라비아노였다.

언론을 장악한 베를루스코니는 그동안 온갖 스캔들 속에서도 “국민이 나를 지지한다”며 배짱을 부렸다. 하지만 그의 섹스스캔들을 재미난 소동으로만 보던, 그가 소유한 언론사들의 편파보도에 눈귀가 가려져있던, ‘경제만 살리면 됐지’라며 민주주의와 언론탄압에도 눈감아주던 국민들도 이제는 지친 모양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자랑하던 ‘60%대 지지율’은 근래 40%대로 떨어졌다. 


지난 5일 로마에서는 베를루스코니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는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다. 야당이나 정치조직이 아닌 한 블로거의 제안으로 열린 이날 시위에는 무려 10만명이 모였다. 시위대는 이 날을 ‘노 B 데이(No B Day)’ 즉 ‘베를루스코니 반대의 날’로 명명했다. 그의 정치적 운명이 조각상 수난에 그칠지, 퇴진과 조기총선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위클리 경향> 85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