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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증언

딸기21 2009. 10. 21.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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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CNN방송 인터넷판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된 소식입니다.

어린 소녀를 납치, 성폭행한 미국 남성이 피해 여성의 용감한 증언과 수사당국의 끈질긴 추적 끝에 19년 만에 체포됐지요. 국내 언론에도 여러 군데 보도가 됐으니 접하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미 연방수사국(FBI)이 8세 소녀를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살해하려 한 데니스 브래드포드(40)라는 남성을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체포했습니다. 브래드포드는 지난 1990년 텍사스주 디킨슨에 있는 한 주택에 창문을 넘어 들어가 잠들어 있던 제니퍼 슈에트(아래 사진)라는 소녀를 납치했지요. 그리고는 아이를 부근의 숲에 데려가 성폭행한 뒤 흉기로 목을 찌르고 도망쳤습니다.


범인은 제니퍼를 죽이려 한 것이지만, 다행히 소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니퍼는 14시간 동안 방치돼 있다가 극적으로 발견돼 목숨을 건졌습니다. 사건 직후에 경찰은 범인이 현장에 남긴 속옷에서 DNA를 추출했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샘플 양이 너무 적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궁에 묻힐 뻔했던 사건은 제니퍼가 용감하게 방송에 나와 당시 상황에 대해 상세한 ‘증언’을 함으로써 전기를 맞았습니다. 올해 27세가 된 제니퍼는 지난달 말 CNN 방송에 출연,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서 성폭행당할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습니다. 범인의 흉기에 목을 크게 다쳤고, 제니퍼를 처음 진찰했던 의사는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했다고 하더군요. 


제니퍼는 강인한 의지로 결국은 이겨냈고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면서 ‘기억과의 싸움’을 소개했습니다. 성폭행당할 당시의 기억이 사라져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기억을 간직하려고 애썼는 겁니다. 


“나는 그 자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 악몽같은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범인을 잡고 비슷한 희생자들이 계속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과 싸웠다는 겁니다.

수사당국은 지난해 최첨단 분석 장비를 이용, 19년 전의 DNA 샘플을 다시 분석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사건이 오래 되어 수사에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제니퍼의 증언으로 용의자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브래드포드는 96년 다른 범죄로 경찰에 한 차례 검거된 적이 있어, 그의 DNA 샘플이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돼 있었다네요. 


경찰은 이를 비교해 마침내 그를 검거했습니다. FBI에 따르면 브래드포드는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니퍼는 범인이 붙잡혔다는 소식에 “오늘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날”이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CNN방송이 범인 검거 뒤 다시 제니퍼를 찾아갔는데, 이 인터뷰에서 제니퍼는 “그 동안 내 삶에는 범인을 잡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가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의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며 “폭력범죄의 희생자들에게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이야기 뿐 아니라, 최근에 아동 성폭행(주로 납치 성폭행)의 피해자들이 외국에서 잇달아 입을 열고 있습니다. 제니퍼 사건이 보도되고 며칠 안 되어, 18년간 성폭행범에 감금됐던 제이시 두가드(29.위 사진)가 미디어에 모습을 비췄습니다. 


두가드는 11살이던 91년 캘리포니아주의 집 앞에서 학교버스를 기다리다가 납치됐습니다. 범인은 필립 가리도라는 남성으로, 당시 40세였습니다. 가리도는 자기 집 뒤뜰에 있는 간이 텐트에 두가드를 가둬놓고 오랜 세월 성폭행을 했고, 두가드는 감금상태에서 그의 두 딸까지 낳았습니다. 


담장이 높게 쳐져 있어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가드와 딸들은 병원이나 학교에도 가지 못한 것은 물론, 햇볕도 제대로 쬐지 못했다는군요.

두가드와 딸들이 구출된 것은 지난 8월입니다. 가리도가 UC버클리대 앞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신원조회 과정에서 가석방 상태인 성폭행범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때 두가드가 낳은 두 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수색 끝에 두가드를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감금돼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살아온 두가드는 물론, 역시 정상적인 환경을 접하지 못한 두 딸도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심리치료가 필요했습니다.


다시 가족들을 만나고 두달 가까이 안정을 취해온 두가드는 피플지 최신호 커버스토리를 통해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밝게 웃는 모습이었고요. 악몽을 지우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승마, 요리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일상생활에 생각보다는 빨리 적응하고 있고, 사회와 등지는 대신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을 알리고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고 하네요.

이달 초에는 엘리자베스 스마트(21)라는 여성이 성폭력 피해 경험을 법정에서 공개했습니다. 스마트는 2002년 자기 집에서 잠을 자다가 납치를 당했습니다. 당시 스마트는 14살이었고요. 납치돼 9개월 동안 나무에 묶인 채 정신병적인 성폭행범에게 끊임없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저 사람은 악마입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를 성폭행했습니다.” 범인은 브라이언 미첼이라는 남성이었는데요. 뻔뻔하게도 미첼과 변호인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중형을 모면하려 했다고 합니다(이런 사건에서 한국의 법원은 범인의 주장을 인정해 ‘감형’을 해주었지요). 


스마트가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은 것은, 이 파렴치한 범인을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마트는 직접 법정에 나와 범인이 자신을 묶어놓고 멋대로 ‘결혼식’을 치른 뒤 성폭행했던 사실, 어린 자신에게 약물과 술을 먹이고 폭행한 사실 등을 모두 증언했습니다. 스마트는 집 근처 캠프장에 묶여있었는데, 지나가던 모터사이클 운전자에게 극적으로 구출돼 화제가 됐었다고 합니다.


스마트 사건을 계기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프로텍트(PROTECT) 법’이라는 것을 통과시켰습니다. 성범죄 전과자가 어린이를 납치 혹은 학대할 경우 의무적으로 종신형을 선고하고 공소시효를 없애는 내용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부시는 스마트를 백악관에 특별 초청해, 그가 보는 앞에서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두가드가 용감하게 모습을 드러내자 스마트는 언론을 통해 같은 고통을 공유한 사람으로서 도움말을 건넸습니다. “끔찍한 과거가 당신의 남은 인생까지 삼켜버리지 않도록 하세요, 당신을 사랑하고 도우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 사건도 빼놓을 수 없지요. 지난달 유명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30여년만에’ 스위스에서 붙잡혔습니다. 영화계의 거장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스위스 등이 석방을 요구하고 그를 편드는 영화인들도 많았습니다. 뒤늦게 왜 체포했는지를 놓고도 말이 분분했지요. 그러면서 외신에는 또 이런 기사도 실렸습니다. “당시의 피해자도 지금은 폴란스키 체포를 원하지 않는다”는.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왜 지금 잡았느냐’가 아니고 ‘왜 지금까지 안 잡았느냐’가 돼야 하는 것 아닐까요. 유명인이든, 재주 많은 사람이든, 거장이 됐든 예술가가 됐든 범죄자는 범죄자입니다. 재주 있다고 용서해주면, 더군다나 어린이를 상대로 한 파렴치한 짓을 용서해주면 그게 과연 사회에 ‘예술적으로’ 도움이 될까요?


폴란스키에 성추행당한 피해자 사만다 가이머는 지금은 세 아들을 둔 어머니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이 사건이 ‘종결’되지 않아 그동안 숱한 괴로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만하자, 폴란스키 사건을 이제는 끝내달라”고 말하기까지 그녀가 그동안 해왔던 발언들부터 들여다봐야할 것 같습니다.


<위클리경향> 기사를 인용해볼게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사디 도일은 9월30일자 칼럼에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가이머의 말이 품고 있는 진짜 의미를 많은 사람이 가해자를 옹호하기 위해 제멋대로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일은 가이머가 1997년 <피플>지와 한 인터뷰를 거론했다. 


"취재기자들과 사진기자들이 학교로 몰려와 타블로이드지에 내 사진을 싣고는 '어린 롤리타'라는 설명을 달았다. 그들은 모두 '13살 요부에게 걸려든 불쌍한 폴란스키'라고 말했다.… 더 지독했던 건 사람들이 모두 엄마 잘못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20년 전 나에 관해 나온 모든 말은 끔찍했다." 


가이머는 앞에서 말한 2003년 LA 타임스 기고에서도 "이 일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때때로 나는 그와 나 모두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힌다"면서 세간의 호들갑으로 인해 지금의 평화로운 삶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그는 또 "안타까운 것은 1977년에 내게 일어난 일이 지금도 날마다 소녀들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폴란스키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사람들의 관심이 정말로 필요한 이가 많은데 모든 관심이 내게 쏠리는 상황은 내게 죄의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도일은 "폴란스키를 처벌하는 것은 성폭행에 대해 관용이란 없으며,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면서 "용서는 사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사법 시스템의 목적은 법을 어기는 사람은 그 누구든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며, 법이 내리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썼다.


끔찍한 폭력의 악몽과 싸우면서 용감하게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은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배우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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