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라이너스 폴링 타계

딸기21 2009. 8. 19.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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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1901년 태어난 라이너스 폴링은 25세에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물리화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0세에는 세계 최고의 화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는 화학에서 생물학으로 방향을 틀어, DNA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자로서도 그는 탁월했다. 폴링은 51년에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제시하고 이듬해에는 DNA의 ‘3중 나선구조’를 내놓았다. 인간 유전 체계의 신비의 사슬은 폴링에 의해 베일이 벗겨지는 듯했다. 그러나 DNA는 3중이 아닌 2중 나선구조임이 드러났고, 이를 밝혀낸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노벨상에 있어서라면 폴링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이미 54년에 화학상을 받았던 데다가, 62년에는 다른 분야에서 또다시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폴링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2개의 노벨상을 탄 유일한 사람이다. 특히 세계가 지금까지도 그를 기억하게 만든 것은 그중 두번째인 평화상을 안겨준 여러 활동들이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해 승리를 거두고 이어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자 폴링은 “냉전 공포가 세계를 핵무기 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반핵운동에 뛰어들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에드거 후버 국장은 그를 감시하도록 지시했고, 매카시즘의 주역인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었다. 
폴링은 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심포지엄에 연사로 초대받았지만 국무부가 여권발급을 거부해 가지 못했다. 이후로도 폴링은 2년 이상 국제학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5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도 간신히 국무부의 허락을 받아 시상식 참석차 출국할 수 있었다.
 
한때 그를 스타과학자로 모셨던 캘리포니아공대(칼텍)의 이사들은 그를 해임하기 위한 꼬투리를 찾았고 연구보조금도 끊겼다. 그러나 폴링은 “자신이 믿는 것을 솔직히 말한다고 해서 처벌을 받는다면 과학은 발전할 수 없다”며 전세계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금지 청원 서명을 받는 등 싸움을 계속했다. 
 
반핵 캠페인 공로로 그는 평화상을 받았으며, 이어 63년에는 핵 군축에 대한 대중적 공감 속에 미국과 소련 간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됐다. 그럼에도 폴링은 연봉이 깎이고 보직에서 해임되는 등의 수모 끝에 64년 칼텍에서 쓸쓸히 사임했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에 폴링의 관심사는 의학으로 향했다. 그는 비타민으로 정신질환에서 암까지 여러 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며 ‘비타민C 캠페인’을 펼쳤다. 

94년 8월 19일 폴링이 사망하자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행동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안전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추모했다. 이라크전 반전시위대 등이 내걸었던 ‘전쟁은 이제 그만(No More War!)’이라는 구호는 폴링이 52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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