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사실 국가를 형성한 고대문명 초창기에서부터 전염병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인류가 가축을 키우기 시작한 이래로 바이러스는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면역력을 시험에 빠뜨리곤 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기원전 430년부터 4년 동안 티푸스가 유행해 인구 4분의1이 숨졌다.
약 20년 뒤인 기원전 412년 그리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날 ‘인플루엔자’로 알려진 병의 증상을 처음으로 기록에 남겼다. 유럽에는 1580년 인플루엔자가 대유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의 의사들은 이 전염병이 10~30년의 주기를 갖고 유행한다는 관찰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
인류와 함께 한 전염병의 역사
한 지역 내에서 발원하지 않은, ‘세계화된 전염병’의 첫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165~180년 로마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황제 시절에 유행한 전염병이다. 근동 지방(현재의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파병됐던 로마 군인들이 병에 걸려 귀국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전염병이 퍼졌다. ‘안토니우스 역병’이라 불리는 이 병으로 500만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보인다. ‘의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의학자 갈렌의 이름을 따 ‘갈렌 역병’이라 하기도 한다. 사학자들은 이 병이 천연두나 홍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541~750년 비잔틴 제국에서 유행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14세기 흑사병과 같은 선(腺)페스트로,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넘어갔다. 전염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만 하루에 1만명씩 숨져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선페스트는 14세기 유럽 전역을 초토화시켰고 17세기까지 수시로 재발해 유럽인들을 괴롭혔다. 현대의 학자들은 14세기 흑사병이 몽골·중앙아시아의 설치류에서 시작된 것임을 밝혀냈다. 인류와 동물 사이, 세균·바이러스의 오랜 교환을 보여주는 사례다.
근래에는 위험이 많이 줄었지만, 티푸스도 빼놓을 수없는 전염병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나 교도소, 선박에서 많이 발생한다고 해서 유럽인들은 ‘막사 열병(camp fever)’, ‘감옥 열병’, ‘선박 열병’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에 나선 유럽 각국과 영주들의 군대가 티푸스로 많은 타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489년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무슬림들과 맞붙은 기독교 군대는 3000명을 전투 중에 잃은 반면, 티푸스로 3만명을 잃었다. 17세기 신성로마제국의 ‘30년 전쟁’과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군인들이 이 병에 많이 희생됐다.
미국 시카고대학 윌리엄 맥닐 교수는 역작 <전염병의 세계사>(1975년)에서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왔다”고 지적했다. 전염병은 한 사회 내에서 인구 구조와 노동 조건, 정치적 역학관계를 바꿀 뿐 아니라 지구적인 차원에서 문명의 형성·전파와 인간의 대규모 이주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시적, 거시적 양 측면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이다.
맥닐 이후의 모든 문명사론들은 바이러스를 비롯한 병원체들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들을 빼놓지 않는다. 소·말·양·돼지 같은 대형 포유류가 없었던 신대륙의 주민들은 동물에서 기원한 바이러스들에 취약해 유럽인들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에 몰살당했다.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 섬의 주민들은 1518년 스페인인들에게서 천연두가 옮아와 인구 절반을 잃었다. 멕시코 테노치티틀란에서도 비슷한 시기 천연두로 15만명이 죽었다. 17세기 멕시코에서는 홍역으로 200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몇몇 학자들은 북·남미 원주민 인구의 95%가 유럽에서 건너간 전염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콜레라 시대'에서 '인플루엔자 시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중에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El Amor en los Tiempos del Colera)>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지구적인 인구 이동이 벌어졌던 19세기는 ‘콜레라의 시대’였다. 아시아를 강타한 수차례의 대역병(大疫病)들이 중국·인도·인도네시아 등에서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유럽·미주 등지로 전파됐다.
20세기에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군인들과 빈곤한 민중들이 전염병에 희생됐다. 20세기의 가장 무서운 전염병으로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를 들 수 있다.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의해 전염되는 에이즈는 현대의 대표적인 팬데믹(세계적인 전염병)이다. 1981년 미 CDC에 의해 처음 보고된 이래 갈수록 감염자가 늘고 있다. 바이러스의 치명성은 발생 20여년이 지나면서 다소 누그러들었으나, 여전히 세계에서 3320만명이 이 병에 감염된 채로 살고 있고 연간 200만명 이상이 HIV에 목숨을 잃는다.
에이즈는 성적 접촉, 수혈, 수직감염(임신부에게서 태아로의 전염) 등으로만 옮겨지는 특이한 질병이다. ‘치사율 100%’라는 점 때문에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에볼라(ebola) 바이러스와 HIV는 아프리카의 영장류에게서 인간으로 전파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환경파괴형 바이러스”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플루엔자의 대유행도 20세기 전염병의 한 특징이다. AI 사태를 계기로 새삼 부각되면서 널리 알려진 ‘스페인 독감’과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등의 인플루엔자가 지구촌을 휩쓸었다.
1918~19년 스페인 독감의 바이러스는 조류를 통해 전염된 H1N1으로 추정된다. 2007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과학자들은 알래스카의 영구 동토층에 매장돼 있던 시신의 폐 조직에서 지금은 박멸돼 사라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유전자를 추출, 되살리는데 성공했다. 과학자들은 이 바이러스와 현재 기승을 부리고 있는 AI 바이러스(H5N1)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바이러스 부활시키기’에 대해 “위험을 자초하는 짓”이라는 비판도 만만찮았다. 의료·보건 전문가들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이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변종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무엇보다 우려하고 있다.
아시아를 강타한 사스는 처음에 병원체가 규명되지 않아 ‘괴질’로 불렸다. 뒤에 신종 바이러스가 규명돼, ‘사스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국 남부 광둥성, 홍콩 등지에서 발생해 ‘모든 것을 다 먹는 중국인의 식생활’이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또한 사스 사태는 중국 당국의 비협조적이고 불투명한 행태로 인해 악화된 측면이 있어, 보건의료 시스템의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해줬다.
최근의 ‘글로벌 전염병’들은 여행, 항공기, 이주, 지역간 식량교환(식품 원재료의 수출·입)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다만 과거에 비해 예방시스템과 치료제가 발달해 대규모 희생자를 내는 전염병의 종류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글로벌 전염병의 위협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구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다.
중요한 것은 제3세계의 수많은 전염병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인구의 대부분을 위협하는 에이즈라든가 황열병·뎅기열 같은 열대성 풍토병, 콜레라·장티푸스를 비롯한 빈국들의 수인성(水因性) 전염병들이 AI나 H1N1 바이러스 같은 유행병보다 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상시적으로 빼앗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타미플루와 AI 백신에 쏠려 있을 때, 지구상 수많은 아이들은 깨끗한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역설적인 현실이다.
팬데믹(pandemic) :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퍼지는 전염병. 세계보건기구(WHO)는 △많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는 질병이 발생해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퍼지는 것을 팬데믹으로 규정하고 있다.
에피데믹(epidemic) : 팬데믹처럼 대륙을 넘나드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넓은 영역에 퍼지는 전염병.
신데믹(syndemic) : 두 개 이상의 질병이 결합돼 퍼지는 전염병.
엔데믹(endemic) : 외부에서 유입되지 않은, 그 지역 내 감염원에 의해 옮겨지는 풍토성 전염병.
역병(plague) : 전염병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지만 주로 유럽에 유행했던 선(腺)페스트(bubonic plague·흑사병)를 가리킴.
감염성 질환(infectious disease) : 바이러스·박테리아·세균·원생생물·다세포 기생생물 등에 의해 옮겨지는 질환의 총칭.
165~180년 : 로마제국 천연두 유행, 500만명 사망
541~750년 : 비잔틴제국 선(線)페스트 대유행
14세기 : 선페스트(흑사병) 대유행, 유럽 인구 3분의 1 인 7500만명 사망
1618~1648년 :‘30년 전쟁’ 중 독일군 선페스트·티푸스로 800만명 사망
1665년 : 런던 대역병으로 영국에서 10만명 사망
1812년 : 나폴레옹군 러시아 공격 중 티푸스로 수십만 명 사망
1816~1826년 : 아시아 대역병(콜레라)으로 인도·중국 등지에서 1500만명 사망
1852~1860년 : 중국, 일본, 필리핀, 한국, 중동 등 2차 아시아 대역병
1881~1896년 : 유럽·러시아 콜레라로 80만명 사망
1865~1917년 : 3차 아시아 대역병으로 200만명 사망
1889~1890년 :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아시아 독감으로 100만명 사망
1899~1923년 : 러시아 콜레라 유행, 50만명 사망
1902~1904년 : 4차 아시아 대역병, 인도·필리핀 100만명 사망
1918~1922년 : 러시아 티푸스 대유행, 300만명 사망
1918~1919년 : 스페인 독감으로 2000만~5000만명 사망
1957~1958년 : 아시아 독감으로 세계에서 200만명 사망
1968~1969년 : 홍콩 독감으로 세계에서 100만명 사망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시더 크릭’이라는 마을에서 이상한 신종 전염병이 발생한다. 감염된 사람의 내장이 녹아 없어지는 무서운 질병에 주민들은 공포에 떤다. 미군 소속 바이러스학자인 샘 대니얼스 대령은 1967년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자신이 발견한 ‘모타바’라는 바이러스가 세상 밖으로 탈출해 전염병을 일으켰음을 확인하고 이 과정을 역추적한다. 바이러스를 쫓는 자와 감추는 자 사이의 치열한 두뇌 싸움과 얽히고 설킨 음모들. 대니얼스는 미군이 치사율 100%의 공격력을 가진 바이러스를 생물학전 무기로 만들기 위해 25년간 비밀스런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95년 제작된 울프강 피터슨 감독의 영화 <아웃브레이크(Outbreak)>의 줄거리다. 더스틴 호프먼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한 이 영화는 중부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에서 발견된 에볼라 바이러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다. 특히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문학·영화 등의 주된 소재 중 하나다. 유럽의 중세 흑사병 시대를 배경으로 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대표적이다. 현대의 소설 중에는 미국 여성작가 캐서린 앤 포터의 <창백한 말, 창백한 기사(Pale Horse, Pale Rider)>(1939)를 들 수 있다. ‘딥 사우스’라 불리는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인플루엔자의 유행 속에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다룬 단편소설이다. ‘창백한 말’은 서구에서 ‘죽음의 사자(使者)’를 상징하며, 전염병의 도래를 암시하는 은유로 쓰인다.
<주라기 공원>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69년작 소설 <안드로메다 스트레인(The Andromeda Strain)>과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71년)도 유명하다. 프랑스의 문호 장 지오노가 51년 쓴 <지붕 위의 기병(Le Hussard Sur Le Toit)>은 19세기 콜레라가 퍼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역시 95년 줄리엣 비노슈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국 뉴웨이브 영화의 기수로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만든 대니 보일 감독의 2002년작 <28일 후(28 Days Later)>는 ‘분노 바이러스’에 의한 신종 전염병의 공포를 다룬 서스펜스물로 인기를 끌었다.
워터하우스가 그린 <데카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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