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어제의 오늘/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딸기21 2009. 4. 1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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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0주년 되는 날이다.

1919년 4월10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는 29명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조선 각지에서 온 교포 1000여명 앞에서 정부 수립 의지를 다진다. 의정원은 임정 수반 선출과 헌법·법률 제정 등을 맡은 입법부였다. 이어진 2차 의정원 회의에는 57명이 참석해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헌법)을 채택했다. 선거를 통해 국무원(각료회의)을 구성,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했다. 내무총장(장관)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재무총장 최재형,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을 임명하고 13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당시 상하이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서방국들의 조계가 있어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손아귀를 피해나가기 쉬웠다. 1918년 여운형, 장덕수, 김철, 조동호 등이 상하이에서 결성한 신한청년당은 이듬해 1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 조선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상하이 조계의 활동이 알려지자 만주와 연해주에 있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소앙 등의 명망가들도 옮겨왔고, 임정 수립에 의견이 모였다. 임정 수립이 선포된 뒤 4월23일 서울에서도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 임정은 노령 대한인국민회, 한성 임시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등을 통합해 1919년 9월 대한민국 단일 임시정부로 재출범한다.

1925년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알려져 탄핵당한 뒤 임정은 리더십 붕괴를 겪는다. 김구가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었지만 1920년대 말 이후 임정은 자금난과 일제의 탄압 때문에 투쟁 능력이 소진된다. 1940년대 광복군을 창설, 독립국가의 무력기반을 만들기 위해 애썼으나 일제의 항복과 미군정의 한반도 점령으로 인해 임정은 사실상 해체된다. 

임정은 남북 분단을 인정치 않았고, 남과 북의 정부도 임정을 독립국의 모체로 대접해주지 않았다. 우리 헌법은 서문에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승만 정부는 임정의 통일노선을 따르지 않았다. 북측 역시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것은 인민공화국”이라며 임정을 홀대했다. 분열과 대립으로 상처입은 임정 90년의 역사는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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