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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 사태를 놓고 러시아와 미국이 상호비방전을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소수민족 탄압을 ‘인종말살’로 규정하면서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어전이었다 주장하고, 미국은 남의 나라 일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침해라며 러시아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과 ‘주권 존중’을 말하는 두 강대국은 과거 소수민족 탄압과 주권 유린을 자행했던 나라들이다.
주권국가에 대한 ‘개입’을 둘러싼 공방전은 강대국들의 이중 잣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0일 뉴욕에서 그루지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4차 회의를 열었으나 미국과 러시아 간 가시돋친 설전만 이어졌다. CNN방송 등을 통해 중계된 이날 회의에서 잘마이 칼릴자드 미국 대사는 러시아측이 그루지야의 미하일 샤카슈빌리 대통령을 축출하려 한다며 “러시아가 그루지야 정권을 교체하려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비탈리 추르킨 러시아 대사는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세르비아에서 한 일을 알고 있다”며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 교체)는 미국이 개발한 것”이라 받아쳤다.
그러자 칼릴자드 대사는 ‘정권 교체’라는 말을 은근슬쩍 ‘지도자 교체(리더십 체인지)’라는 말로 고쳤다. 결국 안보리는 당사국들의 휴전을 촉구하는 성명초안도 못 만든 채 회의를 끝냈다.
앞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중국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오세티야 문제는 그루지야 국경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다른 나라의 주권과 국경선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일 러시아 신문 프라우다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한 일을 생각하라”고 비꼬았다.
부시 대통령은 11일 “러시아가 불균형적인 반응(disproportionate response)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러시아가 약소국 그루지야를 상대로 고강도 화력을 퍼부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병력 6000여명과 탱크 90대, 장갑수송차량 150대, 폭격용 헬기 250대를 배치했다. 그루지야 해안에는 흑해 함대를 보내 봉쇄에 들어갔다. 남오세티야를 제외한 그루지야 땅에 직접 부대를 투입하지는 않았지만, 낙하산부대도 1000명 이상 파병해놓고 있다. AP통신 등은 러시아가 10일 전략폭격기와 탄도미사일까지 동원해 그루지야를 폭격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미국의 ‘불균형 전쟁’ 대상이 됐던 아프간과 이라크에 비하면, 이스라엘과 미국의 군비지원을 받아온 그루지야는 차라리 사정이 양호하다.
러시아의 자가당착을 드러내주는 것은 소수민족 인권에 대한 언급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 이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도 10일 그루지야군이 남오세티야인들을 대량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과거 체첸인들을 거리낌 없이 학살했었다. 특히 푸틴 총리는 1999년 체첸을 가혹하게 짓밟은 뒤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대통령이 됐던 인물이다.
유럽은 지난 2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즉각 지지를 보냈다. 체첸 분리운동에 대해서도 동조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반면 친서방 그루지야에 맞선 압하지야·남오세티야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맞서지도 못하고 있다. 러시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른 시일 내 모스크바를 찾아 ‘중재’에 나서기로 했지만 EU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선전전도 점입가경이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공격을 받은 남오세티야 수도 쯔힌발리에서 2000여명이 숨졌고 수만명이 난민이 됐다고 밝혔다. 프라우다는 그루지야군이 쯔힌발리에서 한 주택에 불을 질러 일가족을 산 채로 불태웠다고 보도했다. 반면 그루지야 측은 사상자 숫자가 과장됐고 난민도 극소수라고 주장했다. BBC방송 등에 따르면 남오세티야인들이 큰 피해를 입고 러시아로 도망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루지야는 유럽을 끌어들이기 위해 러시아군이 송유관을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러시아는 “비군사적 목표물은 공격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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