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택시기사 아저씨

딸기21 2003. 1. 23.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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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동실업이라는 택시회사의 김길웅 아저씨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당산동에서 홍제동까지, 비교적 긴 거리(요금 8,500원 -..-)를 오는 동안 내내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택시를 타고 곧바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드렸었다. 어제 엄마가 우리집에 오시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더니 이 아저씨가 나한테 "집에서 누가 밥하냐"고 물었다. "우리 집에선 밖에 나가 사먹고요, 엄마네 집에선 엄마가 알아서 하시겠죠"라고 했더니 그 때부터 좔~좔~ 아저씨의 이야기(수다)가 넘쳐났다.
"장모님 오시면 사위가 젤 좋아하겠네. 사위사랑은 장모지, 뭐. 친정어머니한테, 닭 한마리 푹 고아서 사위 먹이려 오시라고 하세요. 그럼, 사위는, 장모님한테 용돈이 50만원이야, 50만원! 씨암탉이나 토종닭같은 거를 양념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소금만 쳐서 먹을 수 있도록 그냥 푹푹 고아오시라고 하세요. 50만원이라니깐."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가--아저씨네 집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저씨의 가족사랑 이야기-어머니 보는 앞에서 아줌마 생일날에 발 씻어주고 석달간 연습한 노래를 들려줬다는 대목에 이르자, 한번 들어보겠냐며 노래를 한곡조 뽑는 것이었다. 미리부터 "내가 노래방에 가도 노래 한곡 안 부를 정도로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인데 무려 석달 동안 연습을 했다"더니 과연 음치이면서 감동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가사를 잘 들어보라며--내용은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하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다 듣고나서 박수를 쳐드렸다.
아줌마 손 붙잡고 노래를 불렀더니 다 듣고난 아줌마가 펑펑 울더란다. 너무 감동해서... 그것이 작년 4월이었는데, 그 뒤로 아침에 일어나면 간간이 아줌마의 편지가 있더라는 것이다. 아저씨가 운전하다 말고 쪽지를 꺼냈다. "우리 마누라 이름이 강창귀거든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그리하여 내가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한편의 시...세상에 내 말 들으주고 내 말에 웃어주는 이 많지만 당신이 가장 귀하다는 것이었는데, 이 아줌마 아저씨들, 환갑 넘으신 분들이 정말 닭살 장난 아니다. 큰 소리로 쪽지를 읽고 나서 "한편의 시네요, 시"라고 했더니 이번엔 아저씨가 아예 장문의 편지를 꺼냈다.
좋아, 그럼 나도...라디오 엠씨처럼, 분위기를 잡고 낭송을 했다. 내 등의 무거운 짐은 내가 물살에 흘려내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고, 나를 겸손하게 살게 만들어준 선물이라는 내용이었다. 강창귀 아줌마, 맞춤법은 조금 틀렸지만 내용 좋고 운율 잘 맞고 아주 훌륭한 시였다. 그리고 아저씨가 평소 친구들 부부동반 모임에 혼자 외토리로 참석했을 때 집에 있는 아줌마를 그리워하면서 부른다는 외부엉이 노래(첨 들어봤음)를 한곡 더 부르시고 집에 도착했다. "늙은이 주책이라 생각지 마시고 인생 사는데 도움 됐으면 좋겠다"길래 "너무 재미있었다"고 얘기했다. 진짜 재미있었다.
가끔 택시기사랑 아주 즐겁게 먼 거리 가는 일이 있다. 언젠가는 서초동에서 홍제동까지 가는데 기사할아버지랑 수다를 떨게 됐다. 홍제동에서 30년 넘게 사셨다고 한다. 나 역시 홍제동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래서 주절주절 수다가 이어졌는데, 이 아저씨 아들이 <홍제동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사실 홍제동에서 서울대 들어가는 사람 거의 없다. 서울은 서울이지만 옛날엔 정말 못 사는 동네였다.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나도 홍제동에서 나고 자랐는데 얼마전에 집 샀다고 자랑했더니 아저씨가 운전하다 말고 차 세워놓고, 박수 짝짝짝! 정말 축하한다며, 부모님이 얼마나 기쁘셨겠냐면서...흑흑 할아버지와 젊은 아줌마의 교감이 이뤄진 순간...두고두고 생각해도 감동 어린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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