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어느날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면

딸기21 2002. 9. 2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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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어느날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면. 나를 '부른다'면.
고등학교 때였나, 칼뱅에 대해 배울 때 선생님이 '소명'이라는 말을 했었다. (지금도 가물가물 기억나는 그 선생님은 알고보니 우리 엄마를 짝사랑했던 인물이었대나, 어쨌대나^^)
소명, calling. 나를 부르는, 내가 달려가야만 하는 그 무엇.

어찌어찌해서, 거의 우연적인 어떤 힘에 의해서 지금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 나는 글을 쓰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 부담감의 존재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긴, 글을 쓰는데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 되랴마는.

여학생 중에 문학소녀 아닌 사람 별로 없다고 하지만 나 역시 10대의 어느 시절에는 문학소녀였었다. 책 읽고, 일기 쓰고, 심지어 어설픈 소설도 써봤었다. 물론 그 내용은 지금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맘에 드는 시나 단편소설, 에세이 따위를 베껴써보곤 했던 적도 있다.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 문학소녀의 꿈을 접어버렸다. 친구들과 독서토론 모임도 하고 문집을 내는 활동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욕망을 그만 접었다. 정확히 말하면 욕망을 접은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접은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글과 비교해서 내가 그다지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는 무시무시한 자각과 함께 짧았던 문학소녀의 경력은 끝나버렸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구나, 글을 쓰는 재주는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아니구나 하고 결론을 내린 일은 지금도 내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슨 작가도 아니면서 마치 절필하듯 꿈을 접어버렸던 그 때의 결심은 두고두고 일종의 컴플렉스처럼 내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은 '아냐, 나의 꿈이 워낙 원대해서 그에 걸맞는 자신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야'라고 자위해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에 맘에 드는 두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그 남자와 그 여자-인 아리마와 유키노도 아주 맘에 드는 인물들이지만, 그들보다 더 인상적인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카즈마와 츠바사다. 엄마아빠의 재혼으로 남매 아닌 남매가 된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데, 어느날 '음악이 카즈마를 부른다'.
두 사람의 고민과 갈등을 보면서 '소명'에 대해 새삼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자신을 불러주는, 존재 자체를 걸만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자아를 몽땅 쏟아부을 만한 소명을 찾을 수 있다면.

벌써 나이 서른이 넘어서 애 엄마가 된 주제에, 아직까지 무엇을 해야할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좀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요사이 집에서 쉬면서 그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며칠전 만난 친구는 '아이의 존재는 상상력마저 제한해버린다'는 말을 했다. '애엄마'라는 처지가 나의 상상력을 벌써부터 제약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나를 불러줄 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무언가의 정체가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하면서, 만일 그것이 나를 불렀을 때 내가 응답하고 달려나갈 수 있는지 의심해보면서.

무언가가 나를 부른다면 나는 달려가고 싶을 것이고, 그럴 수 없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참고 참다가 결국 달려나갈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됐든 그럴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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