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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인질 피랍사태] 인질 석방 협상, '지르가'를 움직여야

딸기21 2007. 7. 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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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을 구하는데 현지 부족 원로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프간 특유의 정치구조와 정서 상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족 원로들은 한국ㆍ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사이에서 협상의 중재역을 맡아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에 가장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아프간 특유의 '지르가(jirga)' 제도를 잘 이용하는 것이 협상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은 22일 협상 시한을 하루 연장하면서 "한국이 협상 대표단을 파견했고 부족 원로들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 점"을 이유로 들었다. 앞서 피랍된 한국인들이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가즈니 주(州) 보안책임자 알리샤 아마드자이는 "원로들을 통해 탈레반과 대화를 시작했다"고 말했었다. dpa통신 등 외신들도 아프간 정부가 부족 원로들을 통해 탈레반과 접촉을 시작했다며 "원로들의 의견은 지역민들의 정서를 중시하는 탈레반 입장에서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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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ghan men stand with their sheep under a bridge along the Kabul-Kandahar highway July 22, 2007. / REUTERS



아랍국들에는 유목민 전통에서 내려온 `슈라'라는 협의제가 있지만, 파키스탄과 아프간 등지에는 이와 별도로 지르가라는 부족ㆍ종교지도자 협의기구가 존재한다. 특히 탈레반의 주축인 아프간 남부 파슈툰족 사이에는 지르가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다. 

회의, 모임 등을 가리키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온 지르가는 마을의 연장자, 원로, 부족장, 종교지도자 등 일정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말한다. 지르가는 분쟁이 발생하거나 마을 공동의 문제가 생길 경우 이를 해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나나와테'라 불리는 마을 평의회도 지르가에 의해 움직여지며, 사실상의 법정 기능까지 수행하고 있다.

지르가는 규모에 따라 전국, 주(州), 마을 단위로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아프간 전역의 대표들이 모이는 `로야 지르가(대회의)'는 2002년 정부 수립 과정에서 헌법의 틀을 만드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미드 카르자이 현대통령도 2004년 정식 선거 전 로야 지르가를 통해 과도정부의 임시수반으로 선출됐었다. 현 의회도 울레시 지르가(하원), 메슈라노 지르가(상원ㆍ원로원)로 나뉘어 전통적 지르가 제도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 탈레반 조직구조 자체도 지르가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르가의 원로들은 과거에도 인질사건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중재에 나서 협상을 타결시킨 바 있다. 지난 4월 탈레반에 끌려갔던 프랑스 여성 구호요원은 칸다하르 서부 마이완드에서 부족 원로들의 도움으로 협상이 진행된 끝에 무사히 풀려났다. 구체적인 협상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원로들은 납치된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 또 구호활동을 하던 사람이라는 점을 들며 탈레반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성들은 안전하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피랍된 한국인들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무사히 풀려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섞인 시선들이 많다. 앞서 뉴욕타임스는 탈레반 대변인이 "붙잡힌 이들이 여성들이어서 현장에서 살해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탈레반은 집권 시절 여성탄압으로 악명 높았지만 동시에 여성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탈레반의 이같은 문화는 이슬람법에 의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란(페르시아)과 힌두 전통에 따른 격리의식에 더 많이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서남ㆍ남아시아에는 고유한 푸르다(purdahㆍ장막)' 문화가 있어, 보호라는 명분 아래 사실상 여성들을 격리시키는 풍습이 있다. 푸르다는 여성들의 몸을 가리고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물리적 격리와, 여성들의 대외활동과 대인관계를 막는 사회적 격리 두 차원으로 진행된다. 탈레반을 여성 탄압의 상징으로 만들었던 부르카(아프간 여성들이 몸에 뒤집어쓰는 겉옷)는 푸르다의 전형적인 예다.

탈레반은 부르카 없이는 여성들이 외출도 할수 없게 했으며 교육과 취업을 막고 `부정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들은 누구든 죽일수 있게 하는 극악한 탄압 정치를 시행했다. 탈레반의 여성관은 "푸르다를 지키면 보호하되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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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집권 시절, 거리에 돌아다니는 여성을 매질하는 '이슬람 경찰'(위)과 길거리에서 '부정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처형하려 하는 장면(아래)



무슬림이 아닌 외국인 여성들에 대한 탈레반의 관점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적어도 여성 인질을 직접 살해한 전례는 없다. 지난 4월 납치됐던 프랑스 여성 구호요원은 협상 끝에 풀려났고, 재작년 카불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이탈리아 여성도 20여일만에 무사히 석방됐다.

이라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해 장기 구금 끝에 풀려난 미국 기자 질 캐롤을 비롯해 이라크인과 결혼한 독일 여성, 독일 출신 여성 고고학자, 2004년 억류됐던 일본인 여성 시민운동가 등 외국인 여성들은 대개 풀려났다. 한국인 피랍 여성들에 대해서도 탈레반이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2004년 이라크의 한 무장조직은 인도네시아인들을 억류했다가 여성 인질 2명을 우선 석방한 뒤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탈레반도 남성 인질들을 억류하고 여성들을 협상 과정에서 풀어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반면 이달초 발생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랄 마스지드(붉은사원) 유혈분쟁처럼 무장집단이 여성과 아이들을 인간방패로 억류했던 전례도 있어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는 지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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