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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밀러, <칩워>

딸기21 2024. 11. 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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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워
크리스 밀러. 노정태 옮김. 부키. 11/1


재미있었다.


전형적인 칩의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 영국에 본사를 둔 암ARM이라는 회사에서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이, 미국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반도체 설계도를 디자인한다. 설계도는 대만의 설비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서는 일본에서 온 극히 순수한 실리콘 웨이퍼와 특수한 가스를 사용한다. 원자 몇 개 정도의 두께로 새기고, 배치하고, 측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공작 기계가 반도체 설계도를 웨이퍼에 그려 넣는다. 이런 장비를 제작하는 선도적인 기업은 다섯 곳으로 하나는 네덜란드, 하나는 일본, 나머지 셋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칩은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치는데 테스트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중국으로 보내 핸드폰이나 컴퓨터 부품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토록 적은 수의 기업에 이렇게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경제 영역은 오직 반도체뿐이다. 대만에서 생산하는 칩은 매년 세계가 소비하는 새로운 연산력의 37퍼센트를 제공한다. 한국의 두 기업은 세계 메모리 칩의 44퍼센트를 생산한다.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머신 공급은 네덜란드 기업 ASML에 100퍼센트 의존하고 있다.
-38-39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적 갈등 상황에 글로벌 경제 전체가 인질로 잡혀 있는 이 상황은 역사가 낳은 오류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대만, 한국, 그 외 동아시아가 최신 반도체 생산 거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41

아시아

해외 제조 공장을 아시아에 연 것은 반도체 기업 중 페어차일드가 처음이었다(1963년 홍콩). 하지만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모토로라, 그 외 다른 기업도 재빨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미국의 칩 제조사들이 해외 조립 설비를 운영했다. 홍콩의 시간당 임금 25센트는 미국의 10분의 1이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와 비교하면 가장 높은 수준 이었다. 1960년대 말, 대만의 노동자는 시간당 19센트, 말레이시아는 15센트, 싱가포르는 11센트, 대한민국은 고작 10센트를 받고 있었다.
페어차일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레이시아의 도시 페낭에 조립 시설을 열었다. 반도체 업계는 세계화라는 말을 아무도 쓰지 않았던, 그런 말이 등장하기 10년 전부터 세계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시아 중심 공급망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실리콘밸리에서 노동조합 문제를 겪었다. 동양에는 노조 문제가 전혀 없었다.“(찰리 스포크)
-130-131

베트남전을 질질 끌면서 미국은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우방국에 대한 경제 지원을 끊기 시작했다. 케임브리지에서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제철소를 운영하고 나서 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대만 경제 발전을 이끌던 리궈딩 같은 대만 관료들은 미국과 경제적으로 단단히 통합되는 전략을 구상 하기 시작했다. 그 기획의 중심에 반도체가 있었다.
-143

1970년대 말, 미국의 반도체 기업은 해외에서 수만 명을 고용했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 대만, 동남아시아에 있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칩 제조사들과 아시아의 독재자들, 그리고 많은 경우 아시아 반도체 조립 설비를 채우고 있던 화교 노동자들 사이에 새로운 국제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반도체는 아시아 지역에 있는 미국 동반국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성했다.
한국에서 대만까지, 싱가포르에서 필리핀까지, 반도체 생산 설비를 지도 위에 놓고 보면 마치 아시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해당 지역의 군사 기지를 철수한 후에도, 태평양 전역에 흩어진 반도체 공급망은 지속되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오히려 공산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은 미국과 그 전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145-146

반도체 산업 지원 여부는 워싱턴에서 로비를 통해 결정되었다. 밥 노이스는 의회에서 자본이득세를 49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낮추고, 퇴직연금이 벤처 캐피털 회사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금융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팰로앨토의 샌드힐로드에 자리하고 있는 벤처 캐피털 회사들에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으로 의회는 반도체칩보호법을 통해 지식재산권 규제를 강화했다.
-203

소련

소련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있었다. 잭 킬비가 집적회로 발명으로 2000년에 결국 노벨 물리학 상을 수상할 때(당시 집적회로의 공동 발명자인 밥 노이스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러시아의 과학자 조레스 알페로프Zhores Alferov가 공동 수상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어째서 "베끼는" 전략이 그들을 뒤처지 게 만들고 있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소련 반도체 산업은 모두 일종의 방위 산업체처럼 작동했다. 비밀주의와 상명하복이 만연했고, 군사 시스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명령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끼기" 전략 탓에 트랜지스터 기술에서 미국에 몇 년 뒤처진 채 시작했던 소련은 결코 미국을 따라잡지 못했다.
-110-112

일본

모리타가 이시하라 같은 사람과 함께 책을 쓸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미국인은 충격에 빠졌다. 워싱턴이 육성해 온 일본의 자본가 계급이 국가주의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시하라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굴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은 일본산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하라는 미국의 군사력이 일본의 칩을 필요로 한다고 언급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미국을 격분시켰다. CIA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번역 회람되었다. 모리타는 꼬리를 내렸다. 공식 영어본은 모리타의 원고를 모두 빼고 이시하라의 에세이만 담은 채 출간되었다.
-215-217

일본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정부가 지원하는 과잉 투자라는 불안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마이크론이나 삼성 같은 경쟁자들이 일본 경쟁자들의 설 자리를 빼앗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에서 가장 큰 반도체 생산 업체들은 D램 생산량을 두 배씩 늘리고 있었다.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한 수익을 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지출을 늘리는 것이 CEO로서 편한 선택이었다.
소니는 일본 가전 회사 중 절대 D램에 큰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대신에 이미지 센서image sensors에 특화된 칩처럼 혁신적인 새로운 제품을 개발해 성공했다. 오늘날까지도 소니는 이미지 센서 시장에서 최상급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소니는 손실을 내는 분야를 제때 잘라 내지 못했고, 1990년대 초부터 수익성이 하락했다.
-278-279

도시바에는 마스오카 후지오라는 중간급 공장 관리자가 있었다. 마스오카는 1981년 D램과 달리 전원이 없는 상 태에서도 데이터를 "기억"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메모리 칩을 개발했다. 하지만 도시바는 이 발견을 무시해 버렸고, 결국 이 새로운 메모리 칩을 개발해 처음 시장에 내놓은 것은 인텔이었다. "플래시" 메모리 혹은 낸드NAND 메모리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PC 시대가 오는 것을 놓쳤다는 데 있다. 일본의 D램 기업들은 이미 높은 시장 점유율을 누리고 있었고 금융 비용마저 낮았던 탓에,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무시했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늦었다. 일본의 주식 시장이 폭락했을 때 그들의 반도체 지배력은 이미 잠식되고 있었다. 1993년부터 미국은 반도체를 다시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했다. 1980년대 말 90퍼센트에 달하던 일본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이 되자 20퍼센트까지 내려앉았다.
-280

걸프전

폭탄에 날개를 달아 첨단 전자 장치를 부착한 그것이 바로 군사력의 본성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걸프전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던 빌 페리는 레이저 유도탄이 집적회로, 더 나은 감청, 통신, 연산력으로 인해 가능해진 군사 시스템의 혁명 가운데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걸프전은 페리의 “상쇄 전략"이 대규모로 시험된 첫 번째 전장이었다.
이라크의 건물, 탱크, 공군 기지가 정밀 무기에 폭격당해 파괴되는 영상을 본 이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의 성격이 달라졌다. 이라크 군대는 미국의 공격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첨단 기술이 답이다." 페리가 선언했다. "이 모든 일은 무기가 화력의 양이 아니라 정보에 기반해 작동하고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한 군사 분석가가 언론에서 한 말이다. "강철을 이긴 실리콘", 《뉴욕타임스》의 헤드라인 문구다. "컴퓨터 칩이 영웅의 자리에 오를 수도"라는 또 다른 헤드라인도 신문에 실렸다.
-274-275

대만, TSMC

사람들 대부분은 모리스 창이 대만으로 "돌아갔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그전까지 비즈니스 목적으로 대만을 단 한 번 방문했을 뿐이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생산 설비를 대만에 유치하는 과정에서 대만과 인연을 맺었다. 대만은 자신들이 정통성 있는 중국 정부라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창은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거의 40년 전 중국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대륙에 발을 딛지 않았지만 말이다. 1980년대 중반 현재 창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텍사스였다. 그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국방 관련 일을 했던 터라 미국의 기밀 취급 인가도 받은 사람이었다.
대만이 그에게 공식적으로 제안한 자리는 대만공업기술연구원 ITRI 원장으로, 대만의 반도체 개발의 한가운데에 모리스 창이 서게 될 예정이었다. 리궈딩 같은 관료는 모리스 창에게 섬나라의 반도체 분야 전부를 사실상 지배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하면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받아본 적 없는 백지수표를 준 것이다.
-293

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해 주는 반도체 회사를 만드는 것. 그것은 아직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일하던 1970년대 중반부터 모리스 창이 머릿속에서 굴려 오던 아이디어였다. "연산력이 저렴해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았던 수많은 기기를 위한 반도체 시장이 열릴 걸세." 그가 동료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렇게 전화기에서 자동차, 식기세척기까지 모든 제품에서 칩의 새로운 수요가 발생할 것이다. 창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반도체 생산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니 반도체 제조에 특화된 전문 기업에 아웃소싱할 것이다.
1976년 당시,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자체 제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팹리스fabless" 기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는 조용히 폐기되었다.
창은 파운드리foundry라는 개념을 절대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무르익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반도체 설계에서 린 콘웨이와 카버 미드가 이룬 혁명이 칩 설계가 제조와 훨씬 더 쉽게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미드의 비유에 따르면 반도체 설계와 제조를 나눈 것은 인쇄술의 발명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었다.
-294

설립 첫날부터 TSMC는 일개 민간 기업이 아니었다. 바로 대만의 국가 프로젝트였다.
미국 반도체 산업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TSMC의 초기 성공을 가능케 한 필수 요소였다. TSMC의 고객 대부분은 미국의 반도체 설계자들이었고, TSMC의 최고위급 직원 다수가 실리콘밸리 출신이었다.
TSMC의 출범은 모든 칩 설계자들에게 의존할 만한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TSMC는 절대 칩을 설계하지 않고 그저 만들기만 하겠노라고 모리스 창은 약속했다.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반도체 산업에서 모리스 창의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은팹리스 칩 설계 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296-297

ASML

새로운 리소그래피 장비를 개발하는 일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고, 하나, 많아 봐야 두 개의 회사만 살아남아 시장을 지배하게 될 터였다.
캐논과 니콘의 유일한 실질적 경쟁자는 ASML이었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가전 회사 필립스의 내부에 있던 리소그래피 분과가 떨어져 나와 설립된 회사였다.
리소그래피 장비를 만들기 위해 사내에 막대한 제조 공정을 갖추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대신 ASML은 전 세계 각지에서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하여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일본 경쟁사들은 모든 것을 자체 제작하려 애쓰고 있었던 반면에 ASML은 시장에 존재하는 최고의 부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ASML이 극자외선 장비 개발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다양한 부품을 종합하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능력은 ASML의 가장 큰 강점으로 거듭났다.
두 번째 강점은 의외의 면에서 나왔다. 바로 네덜란드에 있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 분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무렵, ASML은 중립 지대로 보였다.
ASML이 필립스를 모태로 출발했다는 역사마저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대만의 TSMC와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필립스는 TSMC의 창업 단계에서 투자를 했던 회사로, 신생 파운드리 기업에 반도체 제조 노하우와 지식재산권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ASML과 TSMC는 반도체 산업의 변방에서 작은 회사로 출발했지만 함께 성장해 나가며 파트너십을 쌓아 나갔다.
-321-322

2013년부터 ASML의 극자외선 장비 사업을 이끌고 있는 프리츠 반 하우트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개별 부품이 아니라 ASML의 공급망 유지 기술이었다. 반 하우트 는 ASML이 그러한 비즈니스 관계망을 "마치 기계처럼“ 갈고닦았다고 설명했다. 수천여 회사가 ASML의 정확한 요구 사항에 맞는 정교한 제품을 생산하고 납품하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 하우트의 추산에 따르면 극자외선 장비의 부품 중 ASML이 직접 만드는 것은 1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다른 회사의 제품을 구입했다. 이 덕분에 ASML은 세계에서 가장 정밀하게 가공된 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공급망 관리와 타 회사의 동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399

인텔

암의 단순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아키텍처는 머잖아 대중적 사랑을 받게 되었다. 배터리 사용을 고려해야 하는 작고 휴대할 수 있는 기기가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령 닌텐도는 휴대용 비디오게임기에 암 아키 텍처를 도입했는데, 인텔은 이런 작은 시장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인텔이 스스로의 패착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 무 늦었다. 그저 또 다른 휴대용 컴퓨팅 기기일 뿐이고 틈새시장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모바일폰 시장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인텔은 사실상 돈을 찍어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PC용 프로세서 비즈니스에 너무 오래 안주해 있었다.
-333

인텔이 아이폰 칩 공급 계약을 거절한 지 채 몇 년도 흐르지 않아 애플은 스마트폰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인텔이 PC 프로세서를 팔아서 얻는 것보다 더 큰 수익이었다. 인텔은 오늘날 판매되는 칩 중 3분의 1을 차지하는 모바일 기기 분야에 발을 들일 방법을 찾지 못했고, 그 상황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337

193나노미터 빛으로 더 작은 패턴을 새겨 넣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광학 기술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렇게 추가되는 새로운 단계는 곧 시간과 비용의 증가를 의미했다. 2010년대 중반 쯤 되니 무어의 법칙 을 유지해 내려면 더 작은 패턴을 그릴 수 있는 보다 나은 리소그래피 장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유일한 희망은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였으나, 그것은 1990년대 초부터 개발이 시작 된 이래 한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모리스 창은 반도체 업계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극자외 선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394

IBM의 리더들은 칩 생산을 계속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보았다.
글로벌파운드리즈의 2위 경쟁 상대는 대만의 UMC였는데, 두 회사는 각각 파운드리 시장에서 약 10퍼센트씩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50퍼센트 이상을 점유 중이었다. 2015년의 삼성은 파운드리 시장의 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스마트폰 프로세서와 메모리 칩 등 자체 설계한 칩 수요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웨이퍼를 만드는 회사이기도 했다.
ISMC, 인텔, 삼성 모두 극자외선 장비를 도입해야 한다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글로벌파운드리즈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396-397

글로벌파운드리즈는 그 싸움에서 빠 지기로 했다. TSMC, 인텔, 삼성은 극자외선 장비가 작동할 가능성에 판돈을 걸고 주사위를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첨단 프로세서를 만드는 것은 세계 최대의 침 제조사가 아니면 낄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용이 드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글로벌파운드리즈의 실소유주인 페르시아만 석유 부자들의 주머니도 그 돈을 메울 수 있을 정도로 깊지는 않았다. 첨단 로직 칩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회사의 수는 이제 넷에서 셋으로 줄어들었다.
-398

인텔은 트랜지스터가 축소되는 이 새로운 시대
를 기회로 삼기보다는 주도권을 낭비해 버렸고, 인공지능에 필요 한 반도체 아키텍처의 거대한 변화를 놓쳤으며. 그 후 제조 공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무어의 법칙을 지켜 나가는 것도 실패했다.
이것은 단지 한 회사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산업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인텔이 없다면 첨단 프로세서를 제조할 역량을 가진 미국 기업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오직 대만이나 한국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인텔은 신생 반도체 설계 업체를 위협으로 보고 있 었던 반면에 TSMC는 제조 서비스를 위한 잠재 고객으로 인식했다.
-400-401

인텔의 첫 번째 난관은 인공지능이었다. 2010년대 초, 인텔의 핵심 사업 영역인 PC용 프로세서 시장은 성장이 정체되었다. 대신에 인텔의 다른 주요 시장인 데이터센터 서버용 프로세서 판매가 201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아 마존 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그 외 많은 회사가 거대한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가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연산력을 인텔 칩이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 초 인텔이 데이터센터 시장을 정복했을 그 무렵, 컴퓨터의 연산력에 대한 수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한 것은 인공지능이었다. 하지만 인텔의 주요 칩은 구조적으로 인공지능을 위한 계산에 잘 대응하기 어렵게 설계되어 있었다.
1980년대 이래 인텔은 CPU라고 하는 유형의 칩에 특화해 왔다.
CPU는 범용성을 지니지만 단점이 있다. 그 모든 계산을 순차적으로, 한 번에 하나씩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l 알고리즘을 범용 CPU에서 작동시키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AI가 필요로 하는 수준의 연산력을 CPU로 제공하려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비용이 든다.
AI는 매번 다른 데이터를 받아서 같은 계산을 반복적으로 수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AI 알고리즘을 학습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계산을 경제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칩을 특화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이런 데이터센터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 역시 어마어마하게 소비한다. 칩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기업들에게 "클라우드" 공간을 파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AI 작업에 최적화된 칩은 더 빨리 작동하면서 데이터센터 공간을 더 적게 차지하고, 그러면서도 인텔의 범용 CPU보다 더 적은 전력을 소비해야 한다.
-402-403

2010년대 초, 그래픽 칩 설계 회사 엔비디아의 귀에 흥미로운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탠퍼드의 박사후과정 학생들이 엔비디아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GPU는 많은 계산을 동시에 처리하도록 설계 된다. 이러한 구조를 병렬 처리 parallel processing라 하는데, GPU는 AI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다.
그 후 엔비디아는 인공지능에 미래를 걸었다. 창업 초기부터 엔비디아는 칩 제작의 큰 부분을 TSMC에 위탁했다. 대신에 차세대 GPU를 개발하고 엔비디아 칩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래밍 언어인 CUDA를 개선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404

중국의 반도체 구상이 실현된다면 실리콘밸리의 이익만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중국의 반도체 내수화 계획이 성공한다면 중국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수출 주도형 국가들은 더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2017년 현재 집적회로는 한국의 수출 총액 중 15퍼센트, 싱가포르의 수출 총액 중 17퍼센트, 말레이시아의 수출 총액 중 19퍼센트, 필리핀의 수출 총액 중 21퍼센트, 대만의 수출 총액 중에서는 3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제조 2025'는 이 모든 현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촘촘한 공급망과 무역 이동이 걸려 있었다. 전자 제품 공급망은 지난 50년간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떠받쳐 왔던 것이다.
반도체 독립의 구상은 세계화의 종말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거래되며 가장 가치 높은 상품의 생산을 뒤바꾸겠다는 것이었다.
-426-427

화웨이

화웨이와 중국 정부가 관련된 부분은 문서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떻게 화웨이가 전 세계를 아우르는 사업적 성공을 이룰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거대 기업인 한국의 삼성과 화웨이의 궤적을 비교해 보는 편이 화웨이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중국 기업은 세계 시장에 비중을 덜 두는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중국은 수출 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인터넷 기업은 대부분의 돈을 규제와 검열로 보호받는 자국 시장 내에서 벌어들였다.
반면에 화웨이는 초창기부터 외국과의 경쟁을 받아들였다. 런정페이의 사업 모델은 알리바바나 텐센트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해외에서 선구적인 개념을 받아들여 가성비 좋은 버 전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다시 세계 시장에 팔아서 다른 나라 경 쟁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 시장 점유율을 가져왔다. 이 사업 모델은 삼성을 세계 기술 산업의 핵심으로 올려놓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주 최근까지 화웨이는 삼성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450-451

화웨이의 장비는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데이터 송수신 분야의 중요한, 때로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화웨이는 무선 셀 기지국 분야에서 핀란드의 노키아, 스웨덴의 에릭슨과 더불어 세계 3대 사업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지식재산을 훔쳐서 화웨이가 혜택을 본 면이 있겠지만 화웨이의 성공을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화웨이는 효율적인 제조 공정을 개발해 낮은 비용으로 고객이 만족할 법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화웨이의 연구개발 비용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화웨이는 매년 150억 달러가량을 연구개발에 투입하는데. 이 에 견줄 수 있는 기업이라면 구글이나 아마존, 제약회사 머크, 다임러,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회사들 뿐이다.
-453

화웨이는 무선 통신망으로 전화와 데이터를 주고받는 최신 세대 통신, 이른바 5G용 장비 기술을 습득했다. 5G는 전화의 문제가 아니다. 컴퓨터의 미래에 대한 것이며, 그러므로 반도체와 관련되어 있다. 2G 폰은 사진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3G 폰은 웹사이트를 열 수 있었다. 4G로 넘어오자 거의 모든 환경에서 비디오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5G 역 시 그와 유사한 도약을 제공할 것이다.
-462

미국과 중국

조지타운대학교의 벤 부캐넌Ben Buchanan은 AI를 제대로 다루려면 데이터, 알고리즘, 연산력의 '세 기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중국은 그 중 두 영역에서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고, 부족한 것은 오직 연산력뿐이다.
AI 알고리즘을 학습시키기 위한 데이터에 접근하는 데에서 중국도 미국도 확연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중국인을 상대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능력이 군사 영역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영리한 알고리즘을 고안해 내는 문제에서도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AI 전문가 숫자를 놓고 볼 때 중국의 인공지능 역량은 미국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
세 번째 요소인 연산력에서  미국은 여전히 확연한 우위를 갖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외국산 반도체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반도체란 미국이 설게하고 대만에서 제조한 것이다. 인공지능 작업을 위해 돌아가는 중국 서버의 95퍼센트가 엔비디아에서 설계한 GPU를 장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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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국 군사 시스템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 설계하고 대만이 제조한 칩을 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2010년대 중반, 척 헤이글Chuck Hagel 국방장관 같은 관료는 새로운 "상쇄" 전략의 필요성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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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전보장회의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중국과의 경쟁을 근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으로 보았다. 이들은 화웨이 문제를 상업적 과제가 아니라 전략적 과제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지는 화웨이가 직접적으로 중국군을 돕고 있다는 게 아니라, 화웨이가 중국 반도체 설계의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화웨이에 압박을 주기로 결정한 트럼프 정부가 한 첫 번째 일은 화웨이에 미국산 칩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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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트럼프 정부는 화웨이 제재를 더욱 끌어올렸다. 상무부에서 내린 새로운 지침은 미국산 제품의 화웨이 수출을 막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산 기술을 통해 만든 모든 제품의 화웨이 판매를 금지했다. 미국의 제조 장비 없이는 TSMC라 해도 화웨이에 첨단 칩을 만들어 줄 수 없다. 화웨이는 이렇게 간단히 전 세계 반도체 제조업에서 떨어져 나갔다.
세계 반도체 업계는 미국의 규칙에 재빨리 적용해 나갔다. TSMC 회장 마크 리우는 미국의 법을 표면적으로 따르는 차원을 넘어 그 취지까지 따르겠노라고 약속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문제는 단순히 규칙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외도를 해석해야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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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자외선 장비는 국제적인 공급망을 통해 제공되어야 할 수 많은 반도체 제작 기반 중 딱 하나일 뿐이다. 공급망의 모든 요소를 국산화하는 비용은 턱없이 비싸지고 결국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이제 우리는 왜 중국이 말은 거창하게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도체 공급망 전체를 국산화하려 들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베이징 역시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특정 영역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반도체 산업에서 갖는 중량감을 키워서, 가능한 한 많은 병목 지점을 차지해 버리는 것 정도가 중국이 품을 수 있는 현실적인 야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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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봉쇄 작전을 퍼지 않더라도 중국은 항공기와 미사일을 이용한 군사 작전만으로도 대만 군대를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고 대만 경제를 작동 불능 상태에 빠뜨릴 수 있다. 대만 땅에 중국 의 군화 한 짝 들여놓지 않더라도 가능한 일이다. 중국이 행동에 나선 후 며칠 동안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즉각적인 조력을 하기 어렵다. 그러는 동안 중국 공군과 미사일이 대만의 공군 기지, 레이더 시설, 통신 허브, 그 밖에 대만의 생산력을 심각하게 해치지 않는 군사 자산을 무력화할 수 있다.
TSMC 회장은 그 누구도 대만해협과 얽혀 있는 반도체 공급 망을 "교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히 옳은 말을 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공급망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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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발생했던 제3차 대만해협 위기처럼 미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대만해협을 항해하는 것만으 로 중국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아득한 과거의 일일 뿐이다. 오늘날 그런 작전을 수행하면 미국 전함을 치명적 위험에 노출시키는 셈이 된다. 중국이 대만을 상대로 제한적인 군사적 압박을 가하고자 할 때, 미국으로서는 힘의 균형을 면밀하게 따져본 후 중국을 몰아내려 힘을 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결론을 낼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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