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 저자들은 동유럽을 함께 여행했다. 숱하게 기사를 쓰면서 지명으로만 남았던 보스니아가 첫 방문지였다. 1990년대 옛 유고연방의 내전 시간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묻혔던 곳이다. 아름다운 사라예보의 노을 지는 언덕에 줄지어선 흰 묘비들은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안겼다.
세르비아와의 국경선 근처에 있는 스레브레니차를 찾아갔다. 세르비아계 혹은 정교도들은 그곳에서 사흘 만에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계 혹은 무슬림을 학살했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어째서 이런 학살이 벌어졌을까. 민족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길래 이런 잔혹사가 펼쳐지는 것일까. 유고 연방의 70년 역사는 이들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보스니아의 상점들에서는 옛 유고의 지도자이자 지금도 영웅시되는 티토의 초상이 담긴 기념품과 내전이 남긴 총탄을 모아 만든 장식물들을 팔았다. 국경을 넘어 오니 세르비아의 영웅은 테니스 선수 조코비치와 푸틴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는 폴란드의 크라쿠프.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오슈비엥침이 나온다. 세계에 ‘아우슈비츠’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느낀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홀로코스트, 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그 공간의 공포가 온 몸을 에워싸는 경험. 아마도 영원히 풀 수 없을 의문일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기에,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심리적 충격 속에 “이제 앞으로 10년 간 제노사이드는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의 이름으로 대의명분을 가졌던 하마스가 반인도 범죄를 저질렀고, 이스라엘은 그에 대해 제노사이드로 대응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거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밀어내고, 자신들이 바라는 유대인들의 ‘생활공간’을 넓히려 하는 것인가? 이런 비유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반유대주의라고 비난하겠지만 말이다.
난민들이 떼밀려 나오고 유럽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때 세계는 시리아 내전 때 그랬듯이 ‘엑소더스’ ‘난민 사태’라는 이름을 붙이며 골치거리로 치부할 지 모른다. 1400명을 죽인 죄와 1만명 이상을 죽인 죄를 저울의 양쪽 접시에 놓고 무게를 잰다면. 테러와 로켓 공격의 죄와, 땅과 삶과 나라를 빼앗은 죄의 무게를 잰다면. 한 세대의 저항과 수 세대에 걸친 억압과 배제를 놓고 저울질을 한다면. 먼저 공격한 죄와 수십년간 당해온 고통의 무게를 비교한다면.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문제다. 한 사람의 삶이든 만 사람의 목숨이든 모두 무거운 것이니까.
저자들은 오랫동안 언론사에서 일하며 국제 뉴스를 다뤄왔다. 전쟁과 분쟁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뤘던 소재이지만 이토록 많은 의문들은 늘 풀리지 않은 채 머리를 짓누른다. 이 책에서 의문의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고민을 동료 시민들과 함께 이야기하려 애썼다. 책의 첫 장은 지구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힘겨운 여정과 거기에 계속 질곡을 강요한 러시아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미사일 하나, 핵발전소 하나조차도 두 나라의 관계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와 현재의 단면들을 교차시키려고 애썼다.
두번째 챕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다. 이 또한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맥락을 잡기 힘든 이슈다. 이스라엘 건국 때부터 현재까지의 진행과정을 풀어 쓰면서, 이스라엘이 무법자로 인식돼온 과정과 그 도구가 된 정보기관들의 그야말로 무법자적인 행태를 정리했다. 유엔의 숱한 결의안들과 그것들이 나온 배경 속에는 중동전쟁 뿐 아니라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 협력, 시오니즘을 둘러싼 인종주의 논란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중요한 사건들이 녹아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공작들은 미국이 ‘핵개발 의혹’을 빌미로 이라크와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북한까지 압박하는 데에 이스라엘이 빠짐없이 관여해왔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챕터들은 21세기의 주요한 전쟁인 시리아 내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다뤘다. 뒤의 두 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침공으로 일어났고, 미국이 압도적 화력을 쏟아부어 장기전을 치렀음에도 결코 정치적으로 보면 ‘승리’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성적표만 들고 발을 빼야 했던 전쟁들이다. 사건의 진행 과정을 시기 순으로 설명한 뒤 미국의 오만과 일방주의가 어떻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는지, 그 전쟁들이 세계에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분석했다. 전쟁의 민영화와 중국의 부상 같이 지정학적으로 두드러진 측면을 다룬 글들을 덧붙였다.
마지막 장에는 전쟁, 분쟁 뉴스를 오래 들여다 본 저자들의 고민과 바람을 담았다. 전쟁 범죄를 왜 처벌해야 하는가, 전쟁 범죄에 대한 인식과 단죄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한국인들에게 전쟁과 파병 그리고 난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강자의 배짱 앞에 약자들은 그저 다치고 치일 뿐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지만, 미국이라고 무소불위인 것은 아니다.
사람에겐 진화를 통해 습득해온 공감과 연민과 정의감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집합인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앞서게 되면 정의감과 연민은 사라지고 국익이라는 명분 아래 이기주의와 폭력성이 판치게 된다. 하지만 개개인과 국가들 모두의 통합체인 ‘인류’가 되면 보편적 인권과 평화라는 화두가 다시 고개를 들며 윤리적 판단이 ‘냉혹한 국제질서’의 일부이자 한계이자 규범으로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인류애’라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인류애가 깨져나간 단층들을 돌아본 이 책이, 인류애를 일깨우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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