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이정식 역. 올제클래식.
드뎌 읽음.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신의 왕국'과 '암흑의 왕국'은 슬렁슬렁 넘겼지만.
앞부분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전반적으로 번역이... 이건 뭐 오역이나 직역/의역의 문제가 아니라 AI번역기보다도 훨씬 못한 수준. 접속사 그러나/그런데/그리고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의 번역이랄 밖에는.
교황을 일본식 표현인 '법왕'도 모자라 '법왕'과 '법황'을 섞어 번역한 것은 대체 머람. 번역 문장이 참담하다고 말하기도 뭣한 수준의 비문이다. 오래 전 주워둔 책이라 걍 읽었는데, 이왕 읽을 거면 차라리 돈 들여 새로 살 걸 그랬다 ㅠㅠ
독자 가운데 이 책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 어떤 쪽에서는 너무나 큰 자유라고 주장할 것이고, 또 한쪽에서는 너무 많은 권위라고 주장하겠지만 사실 이 같은 쌍방의 논점을 상처 입히지 않고 빠져 나가기란 지극히 어려운 노릇입니다.
본인의 저술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되시면 변명해 주시는 번거로움을 아끼지 말아 주시고 본인은 나 스스로의 의견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25-26
('본인'은 '나'를 가리키는 것. 뒤의 본인은 다른 말로 바꿨어야)
인간의 본성 안에서 우리는 싸움의 세 가지 주요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는 경쟁이며, 둘째는 불신이며, 셋째는 영광이다. 첫째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획득물을 구하여, 둘째의 것은 안전을 구하여, 셋째의 것은 명성을 구하여 침해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일이 명백하여진다. 즉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위압해 두는 공통의 힘이 없이 생활하는 동안에는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며, 이러한 전쟁은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에 대한 전쟁인 것이다.
-128-129
(그 유명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나왔다!)
출생에 관하여 말한다면 신은 남성에 대하여 협력자를 정한 것이며 두 사람이 언제나 똑같이 부모인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에 대한 지배는 평등하게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며 아이들은 똑같이 두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두 사람의 주인에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남성의 쪽이 뛰어난 성이라고 하여 지배를 남성에게만 귀속시켰으나 그 경우 그들은 오산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사이에는 그 권리가 투쟁 없이 결정될 수 있을 정도의 힘이나 깊이, 생각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코먼웰스에서 이 논쟁은 시민법에 의하여 결정되며, 대개의 경우 판결은 아버지를 지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개 코먼웰스가 어머니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들에 의하여 세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단지 자연 상태에 있어서의 일이다. 양친이 계약에 의하여 결정하면 권리는 계약에 따라 이전하게 된다.
-194
그리스와 라틴 저자들의 서적을 읽음으로써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자유라고 하는 그릇된 이름 아래에서) 소란을 좋아하고 그들의 주권자들의 행위를 멋대로 통제하며, 더 나아가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리면서 그들의 통제자를 통제하는 습관을 몸에 익혀 왔다.
-208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생활 태도의 모순에 관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에 대하여 변하지 않는 시민적인 우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으며… 나는 이것들은 정말로 극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교육과 훈련에 의하여, 그들은 화해될 수 있고 또 때로는 화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 오류를 찬미하거나 선호하는 곳에서는 진리를 찬미하고 선호하는 여지는, 만일 찬미할 만한 진리가 있다면, 보다 더욱 클 것이다. 법을 두려워하는 것과 공공의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침해를 그만두는 것과 다른 사람의 그것을 용서하는 것 간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성은 몇몇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시민적인 의무와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650-651
(그래도 마지막은 희망적이네.)
서양 정치 사상 -플라톤에서 아렌트까지
브라이언 레드헤드 엮음. 황주홍 옮김
토마스 홉즈: 회의주의적 국가
리차드 터크.
칼뱅이 세상을 뜨고 『리바이어던』이 출판되어 나왔던 사이의 시대는 종교 개혁이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공화정은 당시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군주에 (칼뱅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에 성립되었으며, 프랑스는 지루한 종교 전쟁 속으로 빨려들어가 있었다. 중부와 북부 유럽은 1648년에야 막을 내 린 30년 전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영국은 1649년 왕이 처형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전쟁과 혁명이 이 시대 정치 사상가들의 중심적인 관심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리바이어던』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홉즈가 태어나던 날인 1588년 4월 5일 그의 부모들은 스페인 무적 함대가 영국에 출진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는 그때 쌍둥이를 낳았는데, 나하고 공포가 그들이었다."
스페인 무적 함대의 패퇴와 이와 유관한 네덜란드 반란군들의 성공 그리고 프랑스 종교 전쟁의 결론 없는 종결이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반종교 개혁 움직임이 종교 개혁을 통해서 상실해버린 근거지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 특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도덕적 상대주의에 점차 매력을 느껴가게 되었다. 몽테뉴와 그의 추종자 피에르 샤롱의 연구를 통한 고대 회의주의의 부활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회의주의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운 또는 우연의 무모함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인정해주는, 그리고 모든 나라가 만장일치의 동의로서 승낙하는, 그처럼 완벽한 하나의 도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44-145
1628년 이후부터 그는 유럽 대륙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1630년대에는 일단의 프랑스 지식인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이 프랑스인들은 16세기말, 17세기초의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새로운 과학의 창조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 그룹의 중심 인물이 지성적 기업가인 마렝 메르센이었고, 그 주변 인물 중 피에르 가센디와 그리고 가장 유명한 데카르트가 있었다.
인간의 모든 연구 영역에서, 특히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새로운 학문이 가능하다는 그들의 사고는 1620년대의 다양한 발전들에 힘입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중 가장 눈부신 업적이 1632년에 『주요한 두 개의 세계 체제에 관한 대화」의 출판으로 절정을 이룬 갈릴레오의 연구였다. 갈릴레오가 보여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진실로 틀린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회의주의자들의 반대 역시 똑같이 진실을 빗맞추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갈릴레오는 관찰만으로 물리학적인 가정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다고 했다. 진정한 물리학은 관찰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할 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상호 경쟁적인 이론들을 판정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관념의 단순성과 정갈성을 지녔을 때 또한 진정한 물리학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성취가 얼마나 경이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대부분의 후대 역사학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윤리학에서 그로티우스가 당시 거둔 성취 또한 얼마나 경이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후반까지 그로티우스는 갈릴레오와 베이컨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학문을 기초한 인물로서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평가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 이후로 그는 국제법사의 후미진 곳으로 좌천되어버렸다.
주저인 『전쟁과 평화의 법』(1625) 속에서 그로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하였으며, 상대주의자들의 딜레마를 해소시켜줄 수 있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보편적인 도덕적 진리 moral uriversals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오직 두 개의 도덕적 진리로 귀결짓게 된다. 하나는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권리를 지닐 뿐만 아니라 생활하는 데 필요한 소유물들을 획득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악의적으로 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생명과 내 생명의 선택 문제라면 나는 나의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나는 당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148
「리바이어던』은 1651년 그가 영국 내전을 피하여 프랑스에 머무르고 있은 지 10년 뒤에 출판된 것으로서 요지는 4부 중 사람들이 읽지 않는 2부인 「기독교 국가 공동체에 관하여」와 「어둠의 왕국에 관하여』 속에 담겨 있다. 이 속에서 홉즈가 자신의 정치적 분석이 어떻게 긴급한 동시대의 문제였던 교회 권위의 문제와 연결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는 짧은 「요약과 결론』 부분에서 1649년 국왕 처형 이후 영국에 수립된 새로운 정부는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홉즈로 하여금 자신의 고국에 귀환하여 평화 속에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가 비록 망명온 찰스의 개인 교수로도 잠시 봉사-찰스 왕은 나중에 홉즈를 가리켜 “내가 만나본 사람 들 중 가장 괴짜"라고 하였거니와 -하였음에도, 홉즈는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뒤 영국의 정치적인 분위기가 자신의 취향에는 훨씬 덜 맞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151
홉즈가 주장했던 것은 우리들이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은 우리들의 두뇌 속에 있는 사건들, 홉즈의 표현을 따르면 우리들의 '모양 seemings' 혹은 '생각 fancies' 속에 있는 사건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성찰 reflection 없이는 우리들 밖의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고사하고, 우리들 밖에 세계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들의 모든 감각 체험 sense esperiences은 전적으로 착각일 수도 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종류의 지식 또는 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152
홉즈가 실제로 믿었던 것은 모든 학문이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볼 때 모두 탄도학 ballistics 이라는 사실이었다.
홉즈는 인간 심리에 관한 모든 설명도 똑같은 관점에서 표현되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생각은 물리적 상호 작용 그대로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 역시, 원리상으로는, 다른 모든 종류의 탄도학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자유 의지 free wil라는 관점은 사라져 버렸다.
홉즈는 그로티우스류의 도덕 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와 똑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을 사용하였다. 중심적 테마는 이런 것이었다. 물질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그 자체로서는 이 세계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전혀 믿을 수 없는 안내자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도덕적 실체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의 생각과 희망이 그의 행동을 이끌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그 자신의 입장에 서서 욕망 또는 소망의 대상인 경우에는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선이라고 한다. 또 자신의 증오 또는 혐오의 대상에 대해서는 악이라 한다. 그 대상물 자체들이 갖고 있는 성질로 미루어 생각할 때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사 이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서 시도될 수 있는 몇 가지 보편적인 사실 generalisations은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닥쳐올 수 있는 가장 나쁜 악이 죽음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서 홉즈는 아주 미묘한 그리고 굉장히 오해를 잘 받는 주장을 펼친다. 죽음이야말로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커다란 악이라는 일반적 합의는 수많은 보편적인 도덕적 명제들을 함축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첫째의 도덕적 명제는 한 개인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한 행동은 무엇이든지간에 그 자신을 위해서 정당하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그렇게 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같은 홉즈의 도덕 명제는 그로티우스의 자기 보존권과 유사한 것이었다.
둘째, 그 밖의 다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위와 같은 종류의 논변이 사용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누구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적어도 똑같은 보편주의적 언어를 가지고 주장할 순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을 연구자들은 흔히 간과해버린 다. 그러나 홉즈는 이 점을 되풀이하여 명백히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그로티우스의 두 가지 원리 중 두번째, 즉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 척인 피해의 금지와 유사한 것이었다.
셋째, 모든 사람들은 무엇이 자신의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타고난 심판관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홉즈의 뿌리깊은 회의주의로부터 유래하는 명제이다.
위에서 설명하였던 두 가지의 도덕적 시사점들은 그로티우스의 사상에 뚜렷하게 동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번째의 것은 그로티우스의 사상을 아주 심하게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이 세번째의 것에 따라 홉즈는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당연히 혹은 오판으로 결론내리기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위험스러운 존재들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종의 전쟁 상태는 인간의 삶을 "고독하고, 가엾고, 불쾌하고, 잔혹하고, 단명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모든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태에서의 그들의 사적인 판단을 완전히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제시한 것이다. 그들이 결단내린 내용은 무엇이 자신들의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모든 궁리를 모조리 한 사람의 주권자 또는 제도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153-155
이 같은 주권자 개념의 리바이어던은 유명한 책표지 속에 있는 그림 속의 평화스런 시골 풍경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동시대인들이 이 책을 읽었던 방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홉즈의 초기 비판자들은 홉즈 사상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충실한 왕당파들이었다. 그 까닭은 홉즈의 저작물들은 많 은 점에서 매우 그리고 놀랍게도 자유지상주의적 libertarian 이었던 것이다. 일례로서, 홉즈의 정통적인 국가 형성에 대한 분석이 암시하는 것은, 만약 어떤 개인이 절대적으로 명백한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의 자기 보존권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홉즈는 교수대로 향해가는 죄수들조차 간수에게 저항하고 그를 죽일 자격을 누린다고 주장함으로써 독자들을 경악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가) 주권 sovereign은 그 자신을 방어하고, 자기 백성의 보호라는 명분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이 두 가지 종류의 임무만에 대해서 권한을 가질 뿐이라고 홉즈는 강조하였다. 그 이상으로 역할을 확대하는 경우 그것은 자연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홉즈의 주권자는 따라서 당황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제한되어질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158
토머스 홉스-동의에 의한 절대주의
김병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어떤 점이 특별한가. 왜 역사적, 정치적, 사상적 맥락이 다른 우리 시대에도 그를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하기에 지친 인간은 과연 자기 생명의 보전을 위해 절대적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홉스의 대답에 동의하는 이 시대 사람은 드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를 읽는가. 아마 홉스 사상의 많은 부분이 근대적 인식의 초석이 되고 그 이후 지성사적 변화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홉스의 사상을 설명할 수 있다.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정념으로 가득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 합리성의 결과인 사회계약을 통해 시민사회를 구성하게 된 다는 홉스의 사고는 17세기 유럽의 정치사상은 물론 향후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있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새로운 정치 이론의 출발점이다.
홉스의 이론은 그 이전 정치사상사의 유산으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이론적 기초를 다지려는 시도 위에 서 있다. 첫 번째 단절은 중세부터 서양의 정치적 사고의 중심이었던 기독교와의 단절이며, 두 번째 단절은 서양 학문의 중추인 아리스토텔레스적 학문체제와의 단절이다. 첫 번째 단절은 정치와 교회의 관계라는 전통적이면서 영원한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답을 제시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두 번째 단절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를 모델로 하는 신과학의 체계를 사회과학을 포함한 전 학문 체계에 도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적 구과학의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의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홉스의 정치 이론은 그로티우스의 이론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홉스를 통해 인간의 공포가 정치의 출발점이 된다. 그는 어떤 도덕적 윤리나 종교적 교리를 전제로 하지 않고, 각자의 신앙이나 도덕적 기준의 차이를 넘어서는 정치학의 출발점으로서 생존의 욕구와 이에 따른 공포를 제시한다.
-196-197
스튜어트 왕가 시대의 영국
1588년 4월 5일, 홉스의 어머니는 '아르마다' 가 쳐들어온다는 헛소문에 놀라 홉스를 조산하고 말았다. 홉스는 자서전에서 밝힌 대로 공포와의 쌍생아였다. 홉스가 태어난 해부터 그의 유명한 저서 《리바이어던》이 출판된 1651년까지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내란과 폭동이 유럽을 휩쓸던 시대였으며, 영국 내란으로 왕이 처형당하는 등 엄청난 격변이 몰아친 시대였다.
17세기의 영국은 명실상부한 군주제 국가였다. 왕에게는 국정 수행에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들이 있 었다. 그러나 이 권한들은 시민권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영국 왕은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다스리고 있었다. 교회는 사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한편, 통치자에 대한 신민의 복종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토대로서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었다. 왕의 국가 통치 권리는 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초기 스튜어트 왕가 시대 목사들의 정통적 가르침이었다.
-199-202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국 왕실이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지위를 잘못 사용할 때 국민은 반란을 최선의 대안으로 느낀다는 것이었다. 왕당파들은 내란의 전 과정을 통해 대부분 찰스 왕을 위해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로써 신성 군주론에 기초한 전통적 왕당파의 정치 이론 역시 영국 정치사상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잃게 되었다.
-204
르네상스 시대에 전개된 인문주의를 통한 중세 극복의 시도는 혁명적 변화의 추구이면서 동시에 중세보다 더 먼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의 정신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홉스가 속한 철학자 그룹이 추구한 것은 보다 더 적극적이고 철저한 방식으로 중세를 극복하는 것이었다.중세 이전으로 회귀함으로써가 아니라 중세가 계승한 고대의 전통에 대한 도전과 파괴만이 진정 중세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질서에 따라 모든 물체에는 정해진 자리가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연의 질서는 정적이고 고정된 질서다. 정해진 자리를 벗어난 물체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 하는 성향이 있다. 즉 자연적 운동의 원인은 물체 내부에 존재한다.
결국 이것이 극복된 것은 17세기에 갈릴레오가 제시한 관성의 이론을 통해서였다. 갈릴레오의 과학관에서 출발한 데카르트는 수학적 과학을 통해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인문주의 교육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은 세계의 복잡한 발달을 해석할 수 없었고, 많은 철학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회의주의적 사고의 강조를 통해서 극복하려 했다. 망원경이 발명되는 등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지각능력의 불완전함이 밝혀졌다. 홉스의 과학 체계는 운동 motion에 바탕을 둔 세계관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많은 동조자와의 학문적 연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205-207
1640년대 홉스의 망명 기간에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에는 회의주의적 사고방식이 확산되어 있었다. 회의주의는 어떤 형태의 지식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만한 충분하고 적절한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지식과 연관된 문제 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홉스의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국 철학사보다 프랑스 철학사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출발점은 메르센 중심의 철학자 서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메르센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요 과제는 회의주의의 염세적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209
그는 우리 의식의 바깥에 실제로 무엇인가가 존재하며 그것은 운동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정확한 개념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유클리드 기하학이야말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과학 형태라고 믿었다. 홉스는 정치학을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개념 정의에 기초해 구성하는 것이 현실의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인식했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삶은 폭력에 의한 죽음의 공포로 점철돼 있으며,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고 짧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 행위의 기본적 동기는 자기 이익과 공포이며, 선악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공포 중 가장 큰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이고, 이와 연관해 인간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자기 보존이다. 따라서 법, 도덕, 제도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 자기 보존에 유용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인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보존을 전적으로 자신의 힘에 의존해야만 한다. 특히 인간의 능력은 평등하므로 자연적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자연 상태는 거의 평등한 육체적 • 정신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자기 자신의 생명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상태다. 그것은 전쟁 상태, 즉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공멸을 초래하는 상태다. 자연 상태를 극복하는 출발점은 자연법이다.
자연법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권자에 의해 실정법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인간이 국가를 창조하는 것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해 질서를 부여한 것과 같이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다. 생명 보존의 원리인 자연법은 국가 성립이라는 목적을 위한 원리로서 작용한다. 따라서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은 자연법의 원리에 입각해 계약을 통해 '리바이어던'을 만드는 것이다.
-210-211
국가의 영혼은 바로 주권자, 즉 군주다… 그의 사상 속에서 주권자는 사랑이나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막강한 힘을 가진 공포의 대상이다. 홉스의 주권자에게 신민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오직 공포뿐이다.
-223
그러나 홉스는 주권자의 권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거부한다. 이제 국가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홉스는 주권론을 전개함에 있어 왕권신수설을 거부했다.
법은 무력 없이는 집행이 불가능하므로 사람들이 안전한 생존의 자유를 원한다면 주권자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복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신민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생명 보존의 권리가 있다. 신민은 주권자의 명령이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될 경우 복종을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
-212-213
그는 주권자와의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인한 저항을 부정했으며 반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홉스는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는 군주도 침해할 수 없는 시민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보통법적 자유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주권자의 절대적 권위에 맞서는 신민 권리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기 보존의 권리에 대한 제약, 즉 투옥 등은 신민의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214
정부 형태로서의 군주제에 대한 그의 강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왕권신수설을 왕권 수호의 이데올로기로 삼으려 한 왕당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크롬웰 주변의 사람 들이나 의회파도 홉스의 군주제 선호, 성서나 종교에 대한 태도 등에 비추어 홉스의 이론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216
그의 의도는, 성경의 어떤 부분이 신에 의해 계시된 것이고 신학적 전제로 인정된다면 신학적 전제와는 독립적으로 구성된 정치사상의 원리들 또한 이러한 신학적 전제와 공존할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학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꾀하려는 것이었다. 홉스의 이론은 종교적 견해가 어떤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신의 생명 보존을 추구하 는 합리적 인간을 위한 것이다.
-222
홉스는 인간의 공포에서 출발해 모든 이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의 완성을 시도했다. 그의 주장은 당대에 열렬한 동조자를 갖지 못했지만, 사회계약론의 형태로 후일의 정치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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