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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했던 책,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딸기21 2023. 10. 1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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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  |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총서 기초연구시리즈 23
구기연 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구기연 박사님이 중동/아랍/이슬람 전문가들로 '어벤저스' 팀을 구성해 한 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3월 말 북토크를 했는데 토론자로 참여할 좋은 기회를 주셨다. 지난번 아시아연 여성 인류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 책과 북토크도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좋은 시간. 남녀 동수 패널의 북토크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래는 <황해문화> 2023년 가을호에 실은 서평.

 

민주주의는 정말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일까? 그렇다면 시리아에는 지금쯤 민주주의의 가냘픈 싹이라도 텄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만큼의 피가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질문을 좀 더 잔혹하게 바꿔보자. 피를 먹으면,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정말로 자라나기는 하는 걸까? 

 

‘아랍의 봄’이 시작됐던 때가 생각난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튀니지에서 노점상 청년이 몸에 불을 붙였고, 시위가 이집트로 확산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설마, 설마 호스니 무바라크가 쫓겨날까?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집트에 특사를 보냈다. 프랭크 와이즈너 특사는 무바라크의 이익을 옹호해온 로펌 출신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이 같은 그의 아버지가 과거 이란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몰아낸 쿠데타를 꾸민 자였다는 것이다. 그 아들을 특사랍시고 보낸 것을 보면 미국도 설마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무너지길 바랐을 리도 없거니와.

 

어릴 적 나의 꿈은 파라오의 유적을 찾아다니는 멋진 고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혹시 이집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면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공상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편지를 써볼까 했던 그 대통령이 무바라크였다. 내가 10살 때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무바라크는 그 후 30년 동안 이집트 대통령이었고, 내가 40살이 됐을 때 결국 무너져내렸다.  

 

<아랍의 봄 그 후 10년의 흐름>(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은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 서아시아센터를 맡아 운영하는 구기연 선생이 내로라하는 중동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중동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아니 어떻게 저 필자들을 다 모았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구 선생의 말대로 중동/아랍/이슬람 전문가들의 ‘어벤저스’ 팀을 꾸린 셈이다. 인류학자로서 이란 젊은이들,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봐온 그는 2020년에 국내 여성 인류학자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여성 연구자, 선을 넘다>라는 책을 냈는데 이번 책은 무대를 중동과 북아프리카로 좁혔고, 주제도 ‘아랍의 봄 이후’로 한정시켜 밀도를 높였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중동 전문가도 아니지만 기자로 일하면서 중동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2001년 9.11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아랍의 봄’과 시리아 내전, 난민 사태 등등을 거치며  20여 년 동안 이슈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지역에 대해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에는 국내에 번역된 책조차 별로 없어서 읽을거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현지에서 공부하고 계속 현지를 오가며 연구해온 열성적인 신진 학자들의 세대가 생겨났고, 중동학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어느 지역에 대한 학문보다 활발하고 역동적인 분야가 됐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런 책들이다. 

 

‘중동’은 오래 전 유럽인들 시각에서 바라본, 지리를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이슬람권은 종교와 문화를 근거로 삼는데 거기에는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 등을 비롯해 ‘중동’에 속하지 않는 여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포함된다. ‘아랍’은 언어와 민족을 중심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집트와 튀니지,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반면에 인구의 다수가 아랍인이 아닌 이란이나 튀르키예 같은 나라들은 거기서 빠진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언어나 민족, 종교가 아닌 지리적 구분으로 ‘중동-북아프리카(MENA)’라는 명칭을 많이 쓴다. 

 

아마도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사람들 중에는 현재의 이집트보다 파라오 시절의 고대 이집트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중동의 격변과 시리아 내전에 대해 뉴스에서 흘려듣기는 했지만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독재정권 밑에서나마 목숨 지키며 사는 게 낫겠다’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 혁명’이라며 지레 역사적 비관론으로 돌아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자세히 몰랐던 각국의 속사정을 개괄해주는 중동-북아프리카 최근 역사 개론서다. 워낙 이 지역이 숨가쁘게 돌아가다 보니 매일 뉴스를 체크하는 사람들조차 디테일을 챙기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한국 학자들이, 그것도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깊이 고민해온 분들이 10여년의 이슈를 쭉 정리한 책을 내준 것은 고맙기 그지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슈 요약으로 끝낼 수는 없다. ‘사건’은 늘 일어난다. 모으고 해석하고 평가해야 역사가 된다. 뉴스는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아랍의 봄’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지역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 그리고 세계 전체에 미친 파장은 이런 책을 통해서 두고두고 평가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세기 초반 미국이 일으킨 대테러 전쟁을 바라보면서 한국 미디어와 시민들의 국제 이슈에 대한 감각, 중동-북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은 한 단계 진화했다. 서구에서 빌어온 시각에서 벗어나 미국의 횡포와 강국들의 위선을 인식하는 중대한 계기가 됐다. 한국 언론의 현지 취재도 늘었다. 그럼에도 중동-아랍권은 정체된 지역, 기껏해야 석유 때문에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던 차에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났고, 그곳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곧 이은 시리아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이슬람국가(ISIS)라는 가공할 집단의 만행들은 이 지역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다시 한번 뒤틀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편견을 굳혀버렸다. 하지만 이 책과 같은 학자들의 고민과 연구의 결과물들을 통해 그 지역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 문제의식들은 이집트의, 이라크의, 예멘과 레바논의, 이란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역사가 만들어낸 지역의 특수성과 함께, 식민지에서 해방된 국가들이 걸어온 공통의 경로와 보편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튀니지를 다룬 첫 챕터에서 엄한진 선생이 지적했듯이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외부 세계가 못 보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부족주의와 종파갈등, 정체성 싸움을 불변의 것으로 설정하는 본질주의적 설명이나 ‘중동은 원래 그래’ 하는 식의 예단을 피하고 시민들의 불만과 갈등이 누적된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예를 들어 예멘 문제를 다룰 때 국내 언론에서는 흔히 전근대적인 부족주의가 남아있는 곳임을 강조하곤 한다. 황의현 선생은 “부족주의는 예멘인의 유전자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알리 압둘라 살레흐 독재정권의 통치 때문에 공고해진 것”이라 분석한다. 

 

외국의 개입이나 식민 점령통치의 잔재들을 명확히 비판하면서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지 않고 여러 정치 행위자들의 능동성을 강조하면서 내부의 동력들을 규명하려 애쓴 것도 돋보인다. ‘아랍의 봄’에서 비껴나 있었지만 그 뒤로 사회적 불만이 산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레바논 상황을 담은 이경수 선생의 글, 바레인이라는 작은 섬나라의 역사와 함께 정치상황과 지정학적 측면까지 분석한 최지원 선생의 글, 이집트 군부의 성장과정을 설명한 하현정 선생의 글 등이 그렇다. 김강석 선생은 종파주의 프레임으로 서로를 옭아맨 시리아에서 반군 내의 다양성이 오히려 없어진 현상, 그의 표현을 빌면 ‘종파주의의 정치화’가 일어난 과정을 보여주면서 시리아 내전에 대한 미국의 방기와 오판, 러시아의 개입과 정치적 주도 등등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국내 중동 연구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이 책을 통해 한층 올라간 만큼, 다시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올지 모를 ‘다음 책’에서 다뤄줬으면 싶은 것들이 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양립 가능한 개념일까? 이번 책은 국가 별로 챕터를 구성해놨다. 지역에 따라 역사적 맥락이 다르고 정치상황에 대한 필자들의 견해도 당연히 다르다. 예를 들면 튀니지를 다룬 장은 다른 아랍국들과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 리더십이 없었던 자발적인 혁명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슬람 정치조직 ‘엔나흐다’를 중심으로 ‘이슬람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반면에 장지향 선생은 튀르키예를 분석하면서 이슬람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력 강화와 함께 무너졌다고 지적한다. 이집트에서는 무슬림형제단 정권이 붕괴된 이래 이슬람 민주주의를 논하기조차 힘들어진 상황이다. 박현도 선생이 살라피즘 등 이슬람주의를 다루기는 했지만 이슬람 정치세력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놓고 상호토론이 진행됐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두번째, 여성과 소수민족 등 마이너리티들이 보고 겪은 ‘아랍의 봄’은 어땠을까. 책은 정치과정과 전쟁 등을 중심으로 정리돼 있어서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는 적게 들어가 있다. 사회적 역학관계 속에서 마이너리티들의 경험과 역할을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구기연 선생은 2009년 대선 부정선거 시비가 촉발시킨 이란의 ‘녹색 혁명’과 여성들의 역할을 얘기했는데, 억압적인 신정체제에서도 여성의 정치활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구정은의 '수상한 GPS'] 사우디가 이라크 땅에 농사를 지으면

걸프전 이후 30년 동안 닫혀 있던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의 국경이 열렸다. 미국 정부가 바뀌고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이 손 잡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사우디-이라크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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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같은 국가들은 다루지 않았다.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들인 탓이다. 그러나 이 산유국들은 경제적 측면, 지정학적 동향 외에 기후대응 체제에서도 아주 중요한 나라들이다. 탈탄소 시대에도 계속 핫할 것으로 보이는 걸프에 대한 분석도 기다려 본다.

 

책의 바레인 챕터는 수니 지배자와 시아 국민이라는 구도를 넘어서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인구학적 요인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인구 구성이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는 것은, 이주민 중심의 걸프국가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이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이주노동자 노동권 문제가 불거졌지만, 주민과 시민권자의 불균형은 민주주의에도 핵심적인 장애물이다. MENA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이고 난민도 많다. 인구 구조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관심 가져볼 만한 주제가 될 것 같다. 

 

‘아랍의 봄’ 이후, 특히 미국의 두 차례 정권 교체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진행되고 있는 중동 및 세계 질서의 변화가 그곳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민주주의에 갖는 함의는 뭘까. 인남식 선생이 마지막 글에서 세계에 미친 파장을 정리했는데 ‘아랍의 봄’은 10주년, 20주년, 30주년 계속 평가해야 할 사건이다. ‘그 후의 그 후’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연구 성과들을 정리해나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체성이 늘 화두가 된다. 민주주의에 적합한 민족성/지역성이라는 것이 있을까? “이란은 태초부터 제국이었다”, “중국은 전제정치에 특화돼 있다”, 좀 더 개량된 표현으로는 “아시아에는 아시아식 민주주의가 있다”, 더 그럴싸하게 말하면 “개발독재가 아시아의 용들을 키웠다”, 부정형으로 바꾸면 “남미/아프리카/남유럽 사람들은 게을러서 발전하기 힘들다”, “아랍은 정체됐다”, “이스라엘 말고는 중동에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나라가 없다”는 식의 진단이 넘쳐난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이, 고정된 정체성이나 민족의 타고난 특성 따위는 없다. 종파 갈등을 넘어 시민적 정체성으로 나아간 이라크의 희망적인 사례를 분석한 남옥정 선생의 글은 그런 면에서 눈에 띈다. 물론 잇단 시민혁명 이후 MENA의 상황이 밝지만은 않다. 오히려 좌절스러운 부분이 더 많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보면 연구자들이 지역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과 기대가 많이 느껴졌다. 그 기대와 희망에 한 스푼이나마 마음을 보태고 싶다. 

 

시민혁명 3년 뒤에 이집트를 방문했다. 이미 압델 파타 엘시시 정권의 억압이 시작됐던 때였다. “이제 이집트의 짧았던 봄은 끝난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한번 자유를 맛본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민주주의는 키우고 가꿔야 자란다. 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된다. 한국이 민주주의를 이 정도 누리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정말 짧았던 봄을 지나 다시 쿠데타 정부가 들어섰고, 학살과 억압을 거쳐 민주선거를 쟁취한 뒤에도 다시 유사 군부정권을 겪었다. 아랍 세계는 이제 겨우 10년을 걸어왔을 뿐이다. 과거는 때론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지만 반대로 쉽게 잊히기도 한다. 민주주의란 얼마나 힘겹게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여기 담긴 문제의식들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고민을 심화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다.

 

 

[아래는 스크랩]

 

마그레브 지역은 아랍의 동쪽인 마슈렉에 비해 아랍사회로서의 정체성이 약한 편이다. 그로 인해 아랍 민족주의나 아랍 문화보다 이슬람이 이들의 정체성과 이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그레브 3국이 상대적으로 더 강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문화적 정치적인 면에서는 서구화 근대화가 더 진척됐지만 경제적으로는 더 열악하다는 평가가 있다… 부르기바는 튀니지 근대화의 상징 인물로 당시 아랍 세계의 지도자 중에서 여성 해방에 기여한 유일한 인물이다. 식민지 해방 직후 일부다처제, 조혼 등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여성 해방의 물꼬를 텄다.
튀니지는 이슬람주의 측면에서도 각별한 모습을 보여준 나라다. 엔나흐다의 지도자 하셰드 간누시는 모로코의 압델살람 야신, 알제리의 압바시 마다니, 알리 벨하지 등과 함께 1980~90년대 아랍 이슬람주의의 영웅시대를 장식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슬람주의 진영에서도 튀니지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근대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특성은 최근 엔나흐다 지도자 간누시가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이슬람 민주주의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토록 원하던 제도권 정치 참여가 가능해진 상황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이슬람주의의 길을 개척하려는 것이다.
-13쪽

아랍의 봄에 대해 외부 세계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 했고 내부 동력보다 소셜미디어라는 신기술의 힘을 강조했다. 외부 세계가 보지 못한 더 정확하게는 보지 않으려 했던 흐름은 감춰져 있었다. 유럽과 미국은 이슬람주의를 악마화하면서 이 최대의 악을 막기 위해서는 권위주의 정권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독재 정권의 편에 서 왔다. 오랫동안 독재가 숙명이라는 사고가 아랍 세계를 향한 지배적인 시각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유의미한 세력이 된 이슬람주의 역시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아랍 정치의 상수로 간주됐다. 1950년대부터 20여 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비동맹 노선, 아랍 민족주의 시대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한 세대 정도의 역사만을 가진 이슬람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시각이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을 보지 못하게 했다.
사실 민주적 변화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 놀라운 것이다. 서유럽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아랍 세계는 어느 지역보다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정치적 사상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장 늦게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유는 이를 저지하는 구조적인 제약이나 외세의 개입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민주화를 억제해 온 요인 중 하나는 아랍 예외주의 이슬람 예외주의 등 국제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전조가 없지 않았으며 아랍 세계는 풍부한 혁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17~18쪽

우발성에 기대 사회운동이 어떻게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대중의 요구가 현실이 될 수 있었는가? 최근의 한 연구는 그 요인 중 하나로 시위 현장에서 그들이 공유했던 강렬한 집합 감정(collective emotions)을 꼽는다. 조직적인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작한 시위였으나 그렇다고 목적이 불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에서 시민들은 대통령 사퇴라는 분명한 목표를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시위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형성되고 확산된 세 가지 공통의 메시지, 즉 권위주의 리더십의 악마화, 인근 아랍 국가들에 대한 연대, 그리고 시민에 가해진 잔혹한 국가 폭력에 대한 고발이라는 시위의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36쪽

이집트 군이 처음부터 강한 정치 세력은 아니었다. 양차 대전 기간 군부는 오히려 약했다. 이집트는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후 20여 년간 영국군이 이집트에 주둔했고 이집트 군은 상대적으로 세력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한 이집트군은 국내에서 위상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1년 무바라크 정권의 시작과 함께 미국의 지원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화한 이집트 군은 1990년대부터 시행한 경제 자유화 조치와 함께 거대 기업으로 성장, 군이 보유한 부동산과 징집병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하며 자본을 축적했다.
-42쪽

시시는 2018년 재선에 성공한 이후 2019년에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헌법 개정을 감행했다. 개정안에 의하면 2024년에 시시가 재선될 경우 2030년까지 임기를 지속할 수 있다. 최소 17년 장기집권이다. 일각에서는 시시가 2024년 재선에 성공하면 사실상 종신집권을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집트는 1981년 무바라크 정부 이후 2021년 10월까지 국가비상사태를 유지해왔는데 시시 역시 집권 후 비상사태를 연장하다가 비상사태 해제와 함께 그에 준하는 행정부의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관련 법을 개정했다. 이집트 정부는 또한 1981년부터 형법 중 일부로 신성모독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 법은 종교 인물뿐만 아니라 대통령 등 정부 지도자에 대한 비판을 불법화하고 처벌하는 근거로 이용됐다.
-46쪽

아사드 정권과 반군 모두 종파주의 프레임을 활용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했다. 정권은 반정부 시위대를 급진적 수니파 반란 세력으로 규정했고 반정부 세력 역시 아사드 정권을 알라위 소수 종파 정권으로 선언했다. 
특히 바샤르 대통령은 정권의 생존을 위해 종파주의라는 시한폭탄을 의도적으로 터뜨렸다. 알라위파 정권을 지지하는 이들은 정권 교체로 기득권을 잃고 순위파가 약진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군 장교의 상당수는 정권에 충성하는 알라위파로 구성돼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령이라는 의미의 ‘샤비하’는 정권에 충성하는 알라위파 요원들로 구성된 아사드 친위대로, 정권 안보를 위해 무자비한 반정부 시위대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정권에 의한 종파주의 프레임은 시리아 반군 내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속주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시도를 동반했다. 시리아 국민회의(SNC)는 다원성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종파주의 위협에 대한 시리아 정부의 강조로 다양성이 소멸해 버렸다.
-59쪽

러시아 주도로 아스타나 프로세스가 탄생했다. 그에 따라 2017년 5월 시리아 일부 지역의 긴장 완화 지대 조성이 합의됐다. 그 연속선상에서 푸틴은 2017년 11월 18일 소치에서 시리아 국민대화 의회를 개최했다. 2차 소치회담은 2018년 1월 30일에 열렸으며 시리아 내 다양한 인종 종파를 대표하는 인사 정부와 반군 측 대표단이 참여해 시리아의 새 헌법을 만들고 민주적인 지도자 선출에 대해 논의했다. 이렇게 러시아는 미국과 달리 군사계뿐만 아니라 외교 무대에서도 역량을 발휘하며 시리아 사태를 둘러싼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68쪽

아랍의 봄 이후 예멘을 분열시킨 갈등에는 뿌리 깊은 부족주의와 남북 갈등, 자이드파와 정부 사이의 대립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세기 이후 예멘은 남과 북으로 분열돼 있었다. 시아파의 한 분파인 자이드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북부는 자이드파 지도자인 이맘이 다스렸으며 아덴을 중심으로 한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남부는 1728년 라히즈의 술탄이 자이드 이맘의 지배에서 독립하며 복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북부 이맘국이 독립을 유지한 반면 남부는 1839년 영국 지배 아래에 들어가 아덴 보호령이 되면서 남북 분열이 더욱 고착화했다. 
북부에서는 1962년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로 이맘 왕정이 무너지고 예멘 아랍공화국이 세워졌으나 마지막 이맘 무함마드 알마드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공화 정부와 대립했다. 공화정부는 사우디를 견제하려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았고 예멘 내전은 사우디와 이집트의 대리전으로 확대됐다. 공화정부가 승리한 뒤에도 북예멘에서는 여러 차례 쿠데타가 일어났고 결국 1978년 살레흐가 최종적으로 권력을 잡았다. 1967년 독립한 남부는 69년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면서 중동의 유일한 공산국가인 남예멘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탄생했다.
부족주의를 해체하려던 남예멘과 달리 살레흐는 정부와 협조하는 대가로 부족의 기존 지위와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1980년대 발견된 원유 수입 분배 또한 살레흐 정권이 부족과 측근의 충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79~80쪽

후티라는 명칭은 1990년대 활동했던 명망 높은 자이드파 종교 지도자 바드르 알딘 알후티와 그 아들 후세인 알후티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01년 후세인 알후티는 1990년대 자신이 창당 과정에 함께 했던 진리당을 탈당하고 안사르 알라, 혹은 후티 운동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했다. 2004년 살레흐 정권이 후세인 알후티를 사살하면서 후티 운동은 반군이 됐고 전쟁이 시작됐다. 후세인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형제인 압둘 말리크 알후티가 살레흐 정권과의 투쟁을 이어갔다. 후티 전쟁은 중앙정부와 소외된 지방 사이의 갈등이자 정권의 핵심 지지세력과 배제된 집단 사이의 충돌이며 부족 갈등이었다. 
-83~84쪽

2013년 국민의회당, 공동회의 정당, 남부 분리주의 운동인 히라크(남부 운동), 후티 운동 등 다양한 정치 세력으로 구성된 국민대화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국민대화회의는 구체적인 합의안 없이 2014년 1월 해산됐고 하디 대통령이 구성한 위원회가 연방 개편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2014년 9월 후티 운동은 사나를 장악하며 다시 중앙정부와 대립하는 반군이 됐다. 살레흐와 그 지지세력은 하시드 부족 연합과 과도 정부를 축출하기 위해 후티 반군과 협력했다. 한때 대립하던 후티 반군과 살레흐가 동맹이 되고 한때 협력하던 살레흐와 하시드 부족연합이 이제는 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을 위해 이내 갈라선다)
-86~87쪽

갈등 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또 다른 행위자는 남부 분리 운동 히라크다. 예멘의 봄은 남부에서도 분리주의를 다시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디 대통령은 2015년 7월 아랍연합군과 히라크의 도움으로 후티 반군으로부터 아덴을 탈환했지만 하디와 히라크의 협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아덴 주지사인 알주바이디는 2017년 5월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남부 과도위원회(STC) 결성을 선언하고 남예멘 재건을 천명했다. 하디는 STC를 불법 조직으로 규정했고 양측의 대립은 무력 충돌로까지 발전했다. STC는 2020년 4월 공식적으로 남부 자체를 선언했다. 양측의 갈등은 2020년 12월 거국 내각이 새롭게 출범하면서 봉합됐다.
하디와 STC의 갈등은 아랍연합군을 이끄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의 목표 차이와도 관련돼 있다. 후티 반군 제압과 예멘 안정화를 우선시하는 사우디와 달리 아랍에미리트는 2016년부터 STC에 대해서도 지원을 제공했다. 자원이 풍부한 예멘 남부와 홍해로 향하는 교통 요충지인 바브 알만딥 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무슬림형제단을 중대한 위협으로 보는 아랍에미리트가 하디 정부의 주요 구성원이자 예멘 내 무슬림 형제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슬라흐를 견제하기 위해 STC를 지원한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94~95쪽

부족주의나 종파 갈등은 예멘의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부족이 특히 큰 영향력을 가지는 이유는 부족 전통과 문화가 예멘인의 유전자에 내재한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무언가여서가 아니다. 정권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부족에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주며 권력 유지 수단으로 이용해 온 살레흐의 통치술은 예멘 사회에서 부족주의가 공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부족은 국가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에게 안전과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고, 혁명 이후 혼란기의 부족이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종파 갈등 개념 또한 예멘의 복잡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후티 운동과 살레흐 정권의 전쟁은 종파 갈등이 아니었다. 살레흐 역시 자이드 시아파 출신이었으며 후티 전쟁에서 살레흐를 지원한 하시드 부족연합 또한 상당수가 자이드 시아파에 속한다. 후티 반군과 현재 중앙정부 사이의 대립 또한 수니와 시아의 교리 차이에 따른 갈등이 아닌 새롭게 권력을 잡으려는 집단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집단 사이의 갈등에 가깝다.
-98쪽

미디어, 연구자 대부분은 소수인 수니파가 다수인 시아파를 지배하는 종파 간의 비대칭적 권력 배분을 바레인 정치 불안정의 원인으로 주목해왔다. 완전히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종파간 갈등을 중심으로 한 접근은 바레인의 인구 구성과 그 안의 정치적 사회적 역학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1783년 이래 바레인을 지배해 온 알칼리파 가문은 사우디로부터 건너온 수니 아랍이다. 그에 반해 인구 대다수는 바레인 토착민인 바하르나 시아 아랍인이다. 200년 이상 바레인의 정복자(알파티흐)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족벌주의 정치를 펼쳐온 알칼리파 왕실을 외부 세력으로 인식하며 불만을 표출해 온 시아파 민중 사이의 대립은 단순히 종파 갈등으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양상이 훨씬 복잡하다.
-101쪽 

영국은 정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1910년대 말부터 포괄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개혁에 찬성한 대다수 주민과 개혁에 반대한 알칼리파 가문, 그들의 동맹 세력으로 바레인 사회를 양분했다.
1923년 영국 정부는 54년간 바레인을 통치한 지도자 셰이크 이사 빈 알리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셰이크 하마드 빈 이사를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영국 주도로 진행된 1920년대의 개혁은 행정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며 근본적인 사회 유동성을 이끌지는 못했다.
1932년 걸프 국가 중 최초로 바레인의 석유가 발견되고 진주 양식에 의존했던 산업구조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인근 국가에서 많은 노동력이 밀려들었다. 1938년에는 이란 인도 출신의 숙련 노동자 우호에 대한 우호적 대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걸프 최초의 노동 파업이 발생했다. 1930년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커진 민중의 불만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반정부 운동은 1960년대 말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하기로 함에 따라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영국에 의존해온 지도층은 내부의 정당성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1971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함께 셰이크 이사 빈살만이 바레인 최초의 의회 수립을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72년 제헌의회 설립에 이어 1973년 헌법이 공포됐고 바레인 역사상 첫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셰이크 이사는 정부에 협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1975년 의회를 강제 해산했다. 바레인 최초의 의회는 그렇게 금세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2002년 의회가 재개될 때까지 바레인은 약 30년간 계엄령 체제에 머무르게 된다. 
-102~103쪽

20세기 이래 바레인의 정치 환경은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해 왔으며 시민들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치 참여 의식과 행보를 보여줬다. 1930년대 노동운동, 1950년대 민족주의 운동, 1970~80년대 이슬람주의 운동, 1990년대 대중주의 등 시기마다 주요 행위자는 변화했으나 왕실이 민주에게 계속 저항과 도전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2011년 바레인의 시민봉기는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의 영향에만 국한되지 않는 오랜 시간 이어진 정치운동의 산물이다. 
-105쪽

시민들 사이에 팽배했던 또 다른 불만은 알칼리파 정부가 국내 정치 행위자의 지지를 발판으로 정당성을 도모하기보다는 외부 세력에 의존하면서 국내 야권과 반정부 세력의 내부의 적 낙인을 찍는 레토릭을 사용해 왔다는 점이다. 
미국에 대한 의존은 바레인의 안보 유지에 매우 큰 역할을 해왔다. 영국이 걸프에서 물러난 후 빈자리를 차지해온 미국이 2002년 바레인을 주요 ‘비나토 동맹국(MNNA)’으로 지정했을 만큼 바레인은 미국에도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미 해군 제5함대가 바레인에 주둔하고 있으며 2000년대 초반 미국은 영국이 1930년대 구축한 주파이르 해군 기지를 아프간과 이라크전 군사작전 기지로 활용했다.

조지 w부시 행정부와 이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바레인의 전략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사우디 또한 알칼리파 왕정의 혈맹이자 후원국이다. 두 나라의 유대 관계는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사우디에 대한 의존은 알칼리파 왕실이 정치적 현상 유지를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해왔다. 반면 정부는 국내 반정부 세력에는 '외부 세력', 특히 이란과 내통하는 '내부의 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탄압을 이어왔다. 이라크전 이후 역내 수니-시아 종파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바레인 정부의 '내부의 적' 레토릭도 강화됐다.
108~109쪽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은 알칼리파 정부가 국가안보 기관에 비바레인 국적자들을 대거 고용하고, 나아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들을 포함한 수니 외국인들에게 조직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해왔다는 점이다.
정권의 외국인 용병 고용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초기 군대는 카타르의 알 누아이미나 하사의 바니 칼리드 등 동맹 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됐고, 20세기 초반에는 왕실 친위병(fidawiyya) 이 인근 부족들로부터 고용됐다. 첫 경찰 병력의 상당수도 무스카트 출신 발루치 용병이었다. 그 결과 1960년대에 이르자 경찰의 20%만 발행 시민권자였다. 

자문 관련 고위 직책은 영국인 등 유럽 북미권 인사들이 맞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안보국의 전신인 국가안보수사총국을 1966년부터 1998년까지 이끌며 '바레인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은 영국인 이언 핸더슨이 대표 사례다. 이후 파키스탄인들이 군 인력의 상당 비율을 차지하면서 2000년부터 2010년까지 파키스탄에서 온 인구가 6배 증가했고, 2011년 기준 국가안보기관에 파키스탄 출신이 7000명 가량 포진된 것으로 추산됐다. 외국인 병력은 국가 안보를 도모하는 데 사용되면서 왕실의 권력 강화와 유지에도 동원돼 바레인 시민을 억압한다는 시각이 갈등의 핵심이다.
2000년대 들면서 바레인 정부가 아랍 혹은 비아랍 수니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대거 발급한다는 루머가 확산됐다. 이 의혹은 2006년 정부 전략 고문으로 일하던 수단 출신 영국인 살라흐 알 반다르가 정부의 기밀 프로젝트를 폭로하면서 더욱 증폭됐다(반다르 스캔들). 종파별 인구 균형을 맞추려는 목적으로 수니 이라크인, 발루치인 예멘인 등에게 조직적으로 바레인 시민권을 부여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골자다. 야권은 2011년까지 5만~20만 명이 바레인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이라 추산한다.

-110~111쪽

바레인의 경제 상황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더욱 심한 불안 상태에 들어섰다. 재정 악화 이면에는 막대한 무기 구입이 있다. 
오바마 정부가 인권 탄압 우려로 보류했던 바레인으로의 무기 수출을 트럼프가 전면 허용하면서 2017년과 2018년 사이 바레인 정부는 공식 예산안 14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60억 달러 규모의 무기 거래를 진행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가는 가운데 바레인 정부는 2018년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로부터 100억 달러의 재정위기 구제 패키지를 받았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 대가로 미국에게 더 많은 경제 지원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외부 지원에 길들여져 온 알칼리파 왕실이 앞으로 치러야 할 정치적 대가가 얼마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121~122쪽

ISIS는 이라크 정치 분쟁의 틈을 파고들어 분열을 먹이 삼아 가파르게 성장했다. ISIS에 저항하기 위해 뭉친 민중동원군(PMF)의 무장 활동 합법화는 반란 문화를 공포 문화로 바꿨다.

2015년 무더운 여름 바그다드를 비롯한 남부와 중부의 전기 공급 중단이 장기화되자 시위가 촉발됐다. 알아바디 임기 동안 점차 문화적 형태의 시민운동으로 정착해 나갔고, 반란의 문화는 공포 문화를 극복하고 시민운동으로서 힘을 강화해 갔다.내부 적폐에 분노를 키우고 수년간 정당한 방식으로 정치 체제를 비판하며 고양된 시민 의식은 기존 정치인에 의지하는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여름 바스라에서 발생한 시위는 알아바디 총리가 사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바스라 시위대는 이란이 이라크의 문제들에 책임이 있다고 봤다. 시위대는 바스라 주재 이란 영사관에 방화 공격을 시도하고 반이란 슬로건이 적힌 피켓을 들고 일어났다. 결국 그 해 5월 총선 이후 공석이 된 총리직에 시아파인 아델 압둘 마흐디가 지명되며 혼란이 일단락됐다. 알아바디 총리 임기 중의 시위는 무책임한 정치 세력은 지역과 종파를 떠나 누구라도 대중의 심판대에 오를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닫게 해줬다. 시위대의 요구는 이라크 내 외세 철수와 종파주의 탈피라는 수사학이 대세가 됐다. 이란의 영향력과 테헤란이 지원하는 민병대에 분노한 시위가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는 시민운동으로 승화된 것이다.
-133~134쪽

2015년 이라크 시위는 사회활동가나 시민단체나 정치단체에 소속돼 활동한 경험이 있는 기성세대가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교사, 공무원 등 중산층을 중심으로 전 세대로 확산됐다. 시위가 지속될수록 종파적 정체성에 대한 거부라는 탈종교적 요구로 이어지며 새로운 단계로 도약했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시민들의 희생은 정권 교체 뿐 아니라 제도 변화를 불러올 정치권의 일부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위대는 초기부터 '일하는 정부'를 일관되게 요구해 왔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수니와 시아의 이미지화된 대결 구도는 시아파 정부가 바그다드와 남부 시아파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깨졌다. 알사드르 진영과 이란 연계 세력인 아사이브 알하크나 카타이브 헤즈볼라가 같은 시아파 임에도 오랫동안 갈등 상태에 있었다는 것도 2019년 10월의 티슈린 시위 동안 표면화됐다.

-137~138쪽

티슈린 시위는 정치 계급 간 주요 마찰을 표면화시켰고 그 결과 책임자가 책임을 지거나 유의미한 정치 변화를 수반하는 정치 퍼포먼스가 가능한 무대를 열었다. 티슈린 운동은 특히 이라크 남부에서 이란 개입에 반대하는 중대한 사회 문화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이라크 정책의 화두가 됐다. 이 시위는 포스트 이슬람주의 정치운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 조직화는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새로운 시민사회는 종교 정체성 기반의 정치를 거부했다. 2015년 이라크 시위는 교육을 받은 30세 미만의 젊은 남성 위주로 시작됐다. 시위대는 종파적 보수적인 사드리스트의 시위, 시아파 중심의 이슬람 운동을 수용하기보다 시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시민운동을 선택했다. 그 결과 새로운 시민 중심의 정당 수십 개가 탄생했다. 
-142~143쪽

종교 중심으로 나뉘었던 레바논 정권은 백향목 혁명을 기점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헤즈볼라가 이끄는 친시리아 성향의 3.8 동맹과 사아드 하리리 총리가 속한 미래운동당이 이끄는 반시리아 성향의 3.14 동맹으로 양분된다. 
레바논이 사회통합을 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점은 종파별로 위기 때 도움을 요청하는 국가들이 다르다는 것이다. 수니 지도자들은 사우디와 미국, 시아파는 이란과 시리아, 기독교도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의존하고 있다. 
-160쪽

튀르키예의 이슬람 종단은 세속주의 국가 이데올로기화 작업이 한창이던 1925년 공식적으로 해체됐고 이후 철저히 개인 영역에서 지하 점조직 형태로 활동했다. 원래 종단은 종교를 사적 활동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 정치조직과는 갈등을 빚었다.
튀르키예의 3대 수니 종단은 낙쉬벤디, 누르, 펫훌라흐다. 펫훌라흐 종단은 80년대 중반 이즈미르의 이맘 펫훌라흐 귈렌에 의해 시작됐고 귈렌 운동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미디어 사업에 크게 성공해 유명해졌고 1996년 아시아은행을 세워 빠르게 성장했다. 낙쉬벤디, 누르와 구별되는 이 종단의 특징은 튀르키예의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귈렌은 친미주의자이자 시장경제 지지자로서 사우디와 이란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며 1980년대 투르구트 외잘 총리 정권과 중도 우파 정치인들을 지지했다.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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