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돼 간다. 우크라이나에서 존엄혁명(마이단 혁명)이 일어났다. 소련에서 떨어져나온 뒤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원하면 러시아가 찍어누르고, 시민들이 다시 일어나고, 그러면 다시 러시아가 찍어누르고... 이것의 반복이었다.
러시아는 마이단 혁명 뒤 아예 우크라이나 땅덩이를 떼어가려고 했다.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러시아군 표식만 뗀 군인들 혹은 용병들을 동원해 우크라 동부를 내전 상태로 만들었다. ('그 나라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어 영토를 갈라놓는 것은 패권국들의 흔한 수법이다.)
그 때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이자 유명한 환경운동가였던 어느 선생님은 이런 주장을 했다.
1. 우크라이나 '시민혁명'은 없었다.
2. 키예프의 시위는 CIA가 사주한 쿠데타 음모였다.
3. 미국이 우크라이나 친러 정권을 몰아내려고 한 것은, 이 정권이 유전자변형(GM) 농산물 수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4. 그러니까 우크라이나가 나쁘고 반미 친환경 러시아는 옳다.
어디서 뚝 떨어진 음모론인지... GM 종자 한 알 만큼의 근거도 없는 주장을 보고서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그 때만 해도 저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대대적으로 되풀이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분은 2011년 아랍의 봄 때에도 또오오옥~같은 논리를 들며 리비아에 대한 나토 군사개입을 비판했던 분이다. (군사개입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생략) 그분은 민주주의를 위한 아랍인들의 싸움, 숱한 피가 흘렀던 그들의 투쟁과 '자주성'을 깡그리 부인하면서 '카다피/무바라크/기타등등을 몰아내려는 미국의 음모'로 보는 듯했다.
황당무계한 시각이다. 참고로 미국은 카다피와 무바라크를 몰아내려 하지 않았다. 저 정권들이 유지될 거라며 오히려 유럽을 안심시키려고 특사까지 보냈다. 블레어는 카다피 말년에 아부해 BP에 개발권 따내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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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뉴스 업뎃이 1980년대에 끝난 분들 참 많다. 얼마나 게으르면... 그런데 사실은 그분들이 겔러서가 아니다. 그렇게 게으르게 옛날 주장만 되풀이해도 기득권이 넘쳐흐르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나 좌파 지식인이야'라면서 위세를 부리고 활자권력을 휘두르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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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반미 자주’를 외치는 사람들이 미국을 누구보다 절대시한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의 자주는 무시한다. 이쯤 되면 ‘반미자주 종특’이다. 그러다 보니 팩트를 왜곡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옳고그름조차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다. 트리폴리 시민들이, 키예프 시민들이, 피흘리며 외친 민주주의를 한국의 반미주의자들이 왜? 왜? 왜! 멋대로 평가절하하고 부인하면서 음모론을 퍼붓냔 말이다.
암튼 2014년 우크라이나 친환경 친러정권을 몰아낸 CIA 음모설은 웃고 넘겼다. 정색을 하고 이의를 제기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저 신기한 바퀴벌레 음모론이 각색 증폭 재연되고 있다.
20년 전 바그다드에서 만났던 열혈청년이 있었다. 미국의 침공을 막아보겠다며 글로벌 인간방패 멤버로 들어간 러시아 유학생.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 신문사에서 전문가 대담을 기획하면서 다시 만났다.
러시아 전문가이고 반전 평화운동을 무시무시한 수준(인간방패라니;;)으로 실천하셨던 이분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당연히 규탄한다. 미국이든 러시아든 중국이든 한국이든 남의 나라 침략하고 사람 죽이는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니까. 그러자 어떤 이들은 이분이 ‘미국 시각’이라며 비난한다. 바그다드 일까지 공개하며 ‘내가 친미라는 자들 보아라’ 라는 글을 올리신 걸 읽었다. 그분 ‘반미 경력’은 내가 보증해드릴 수 있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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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런 글까지 올리셨을까 싶었다. 그 글을 보면서 나는 추억이 떠올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지만, 이른바 ‘진보 좌파 반미 지식인’들의 거짓말과 팩트 조작은 도저히 웃고 넘길 수 없는 수준이다.
우크라이나가 나치라고? 우크라이나 동부는 원래 러시아 것이라고? 우크라이나 민족은 없다고? 당신들이 바로 나치들이다. 시민혁명은 없다고? 쿠데타 기도라고? 미국의 사주라고? 미국이 강대국이지만 세상을 다 움직이는 게 아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썩어빠진 미국 지상주의자들이다. '미국' 말고는 세상을 해석할 어떤 도구도 틀도 없는 사람들.
미국이 이란 솔레이마니를 암살하는 이스라엘스런 범죄를 저지르자 서울에서 솔레이마니 애도 행사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홍콩에서 시민들이 반중국 시위를 하니까 ‘중국을 흔들기 위한 미국의 음모’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 논리는 진짜 저들만의 만병통치 프레임인 듯하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니까 ‘민족자주 정권이 들어섰다’며 찬양한 사람, 소말리아 이슬람 극단세력이 ‘반미’라며 편들어주던 사람….
생각해보니, 북한에 대해서는 ‘내재적 접근’을 해야 한다며 3대 세습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에 눈 감는 사람이 아마도 그중 최고봉일 듯 싶다.
이분들은 미국 없이는 죽고 못 사는 것 같다. 미국 욕할 계기만 만들어준다면 후세인도 카다피도 탈레반도 솔레이마니도 푸틴도 김정은도 다 편들어줄 수 있다는, 저 논리 저 마인드.... 보면 모르겠습니까? 님들이 옹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권탄압 학살자 독재자들인 것을. 흥미로운 것은, 반미 지상주의자들과 환경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미투 국면에서 가해자들을 편들고 나선 남성 중심주의자들이 종종 겹쳐진다는 것이다.
모든 인권은 ‘보편적’이다. 그 나라 일은 그 나라 시민들이 결정하는 게 민주주의다. 당장은 눌러놔도 되는 인권, 일단은 보류해도 되는 민주주의 같은 것은 없다. 전쟁을 일으킨 놈이 나쁘다. 남 죽이고 때리는 놈들은 다 나쁘다.
이게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가?
586이든 좌파든 이대남이든,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비폭력에 관해 제대로 못 배우고 자라서 그런 것 같다. 사회 전반의 인권과 민주주의 감수성을 올리는 시민교육이 그래서 참 중요하지 싶다.
(페북에 올린 글, 기록용으로 적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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