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딸기21 2023. 5. 21. 14:38
728x90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이재원 옮김. 그린비.



작년에 읽은 <플루리버스>에서 언급된 책들을 하나씩 읽고 있다. 아슈스 난디의 <친밀한 적>에 이어 비릴리오의 이 책을 읽었다.
프랑스 학자의 글인데다^^;; (그래도 인도 사람들보다는 낫다) 1970년대에 쓰인 것이지만 반짝반짝하는 통찰들이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미국의 대테러전부터 팬데믹 시대의 계급 구분, GPT와 인공지능 등 요즘의 주제들을 생각하며 곱씹어볼 것들이 많았다.
번역자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옮긴이 주석과 해설을 읽는 재미도 컸다.



보병은 적의 포탄이 발사되자마자 적의 포진을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그의 목숨은 달리는 속도에 달려 있다. 너무 느리다면 그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포탄에 맞아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서 죽게 되므로. 결국 이 새로운 전쟁은 인간이 자신을 내던지는 그 경로를 향해 날아오는 치명 적인 발사체에 맞서 그가 획득할 수 있는 시간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제는 도망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안전은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나갈 때"에,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죽일 때에" 찾아온다.
안전은 돌격 속에 있다. 새로운 탄도 운반체들이 도주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전장에 놓인 사람은 이 엔진의 속도가 그려내는 궤적 속으로 자살하듯이 돌입하는 것 이외에는 별달리 안전을 확보할 방법이 없을 듯하다. 이제부터는 최대한의 도달 속도를 지닌 대중들에게만 안전이 찾아올 것이었다.
-78~79쪽

현존함대는 적군이 바라는 바, 곧 승리를 더 이상 확실히 결정할 수 없도록 전세계 모든 곳을 안전하지 않게 만듦으로써 적의 권력의지를 분쇄하는 함대, 언제 어디에서든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함대가 바다에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현존함대란 직접적인 대결이나 유혈참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함대의 불균등한 속성, 기왕에 선택한 요소들 내에서 활용 가능한 운동 방식의 수, 그 역학적 능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검증해서 나오는 새로운 폭력의 관념이다.
-106쪽

가망 없는 전투에 휘둘리기보다는, 장기간 적군의 절망감을 자극해대고 끊임없이 도덕적 물질적 고통을 가해서 적군을 줄여나가며 서서히 제거하기. 이것이야말로 유혈 참사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특정 집단이 절망 속에서 항복하도록 만드는 우회 전략의 임무이다. 옛날 속담이 말하듯이, "공포는 가장 잔인한 자객이다. 공포는 결코 죽이는 법이 없다. 단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 뿐이다."
-106쪽

바다에 대한 권리는 근대 국가의 도로에 대한 권리를 창출하며, 근대 국가는 그 도로를 통해서 전체주의 국가가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외부 집단‘을 희생시킴으로써 경제를 비약시킬 수 없다고, 즉 앞으로는 부의 이식이 아니라 신용과 상업적 계약을 바탕으로 경제가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전쟁은 경제적으로 무익하다고 <거대한 환상>에서 말했을 때, 노먼 에인절은 바로 이런 사실이 정복자를 근본적으로 억누를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착각을 한 것이었다. 부의 성격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세계 경제의 속도가 변했다는 것, 즉 세계 경제가 이동성(움직 임)의 단위에서 시간의 단위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전쟁으로 말이다.
영국은 현존함대와 더불어 운송 영역에서의 기술 혁신에, 고속 엔진의 제작에 온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상 산업 혁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질주정 혁명'이 있었을 뿐이다. 민주정의 지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주정이 있을 뿐이다. 전략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질주학이 있을 뿐이다.
-117쪽

부, 자본 축적, 생산 양식이 그것들을 둘러싼 방벽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자유 기업이나 사회화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운송 능력, 최대의 역학적 능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질주학적 진보의 본질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은 다름 아닌 부라는 ‘무익함’이다.
인구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은 우월하고 지배적인 것처럼 여겨져왔다. 그들이 훨씬 더 빠르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질주정 형태의 진보가 실현되자, 인류는 더 이상 다양하게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인류가 단지 희망적인 사람들(속도를 축적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들)과 열등한 기술적 운송장치 때문에 유한한 세계에서 근근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람들만으로 구분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120쪽

강제수용소와 굴라크가 절대적으로 ‘비인간적’인 이유는 태곳적의 사회적 격투사 같은 존재,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 도 없었던 어마어마한 수의 길들여진 신체를 여봐란 듯이 역사에 재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제4세계인들과도 비슷한 이 사회적 잉여(존재)는 애초에는 봉건적 통제 방법이었으나 곧 코뮌적 사회적 통제 방법이 됐던 현상, 즉 전략적 감금이라는 현상의 직접적인 산물이 됐다.
-165쪽

군인의 제복을 보고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었던 군사적 폭력 대신 좀더 세련된 감시, 위협 체계가 등장하게 됐던 바로 그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혁명인 비밀경찰의 새로운 등장. 사회라는 신체를 침투하고 은밀하게 습격하려 했던 이 시도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군대를 통해서 국가의 개척되지 않은 잠재력(산업적, 경제적, 인구통계학적, 문화적, 과학적,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능력)을 착취한다는 목적이. 그때 이래로, 사회적 침투는 아찔할 만큼 빨리 발전해 나아가는 군사적 침투 기술과 밀접하게 연결됐다. 운송장치가 발전될 때마다 군대와 문명 사이의 구분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206쪽

정부가 이처럼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방식으로 안전에 대한 필요를 교묘하게 조작해내는 것이야말로 핵 전략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새롭게 불러일으킨 온갖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해결 책이다. 핵 국가의 새로운 고립주의는 예컨대 미국에서처럼 정치적 전략을 완전히 혁신시켰다. 마치 대중매체가 자동차나 냉장고에 대한 필요를 공상적으로 창출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새로운 필요를 창출해냄으로써 새로운 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보호(안전)의 소비라는 새로운 형태의 소비를 이끌 공동의 감정, 즉 불안감이라는 발명품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소비는 점진적으로 표면화될 것이며, 모든 상거래 체계의 목표가 될 것이다.
-230쪽

우리는 사실을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날 속도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최후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일단 1962년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중요한 사건으로 되돌아 가보자. 이 당시에 두 초강대국은 전쟁을 선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15분 내에 결정해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카스트로의 섬에 장착될 러시아의 로켓은 곧 이 시간이 30초로 줄어든다는 위협과도 같았다. 결국 양국 간에 직통전화선(핫라인)이 개통된 것이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72년, 통상적인 경보발령 대기시간이 몇 초(탄도미사일의 경우에는 19초, 그리고 위성 무기의 경우에는 단 2초)로 낮춰진 바로 그때에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에서 첫번째 전략무기제한협정에 서명했다.
사실상 이 협정은 무기의 양을 제한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을 보존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완전 자동화된 방어체계가 국가 수장의 성찰 능력과 결정 능력을 박탈해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래로 교전 여부의 결정은 전략 컴퓨터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전쟁기계는 전략 계산기의 반사작용 덕택에 곧 전쟁 여부를 결정하는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억지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이성에게는 도대체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억지력이 자동화된 상 황에서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정이 자동화된 상황에서.
공간의 전쟁이 가져온 포위 상태가 시간의 전쟁이 가져온 비상 상태로 뒤바뀌는 데에는 몇십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정치인들이 이끌던 정치적인 시대는 국가장치에 의한 비정치의 시대로 대체됐다.
-251~252쪽

사람들은 앞으로 핵무기가 자동적으로 통제되는 전례 없는 단계, 즉 인간이 결정을 내릴 때보다 오류의 여지가 훨씬 줄어들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진보의 가능성은 이 체계에 개입할 것인가의 여부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을 훨씬 축소시키거나 완전히 없애버릴 위험이 있다.
-254쪽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 스페인 인민들은 ‘영토 없는 저항’을 창안했다. 대포라는 프랑스군의 가공할 화력이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릴리오의 말을 빌리자면, 스페인 인민들의 저항과 더불어 한 지점에서 전개되는 시민 방어의 시대는 종결됐다. 바야흐로 게릴라전이라는 ‘시간의 저항’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수백 년이 지난 뒤, 미국이 베트남 인민들을 상대로 전개한 생태 전쟁, 즉 적들의 주거 환경뿐 아니라 자연까지 파괴하는 초토화 전략은 또 다른 저항 형태를 낳았다. 이제 (파괴된) 한 지점에서 (파괴 되지 않은) 다른 지점으로 신속하게 움직이며 저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인민들이 창안한 것이 ‘신체 없는 저항’이다. 그들은 땅을 파고 들어갔다. 즉, 자신들의 신체를 적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사라짐의 저항‘이다.
그렇다면, 파고들어갈 땅마저 권력에게 빼앗긴다면 어떤 형태의 저항이 가능한 것일까? 그 답은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긴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인민들이 보여줬다.
-286쪽


파고들어갈 땅조차 없을 때의 저항이란.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