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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베트남 전쟁>

딸기21 2023. 5. 1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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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전쟁을 이야기할 때, 전쟁을 보는 한국 사람들의 시각을 말할 때, 기지촌과 코피노와 성매매를 생각할 때, 파고들어가다 보면 늘 부딪치게 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이다. 우리가 아직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고 있는 전쟁.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특히 내가 스스로에게 놀란(?) 것은, 베트남 전쟁보다 한국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우리 집앞 흙길에 아스팔트가 깔린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는데 1980년대 중반의 나는 친구들과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 구경을 갔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그 기간의 갑작스런 '발전'은 기억 속에서 너무나 놀라운 사건으로 인식돼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1970년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베트남 전쟁과 그 시대의 변화는 어떻게 기억될까? 2000년대 초반 외국에서 있었던 한 학회에서 한국의 어느 대학교수는 베트남전쟁을 ‘신이 한국에 내린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베트남전쟁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한국전쟁을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고 표현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한국사회가 베트남전쟁에 대해 똑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에 대한 일본 극우세력들의 인식이 전쟁으로 인한 한국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다면, 한국 사회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인식 역시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일본의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는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전쟁 특수 부분이 강조되고 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역시 베트남전쟁에 대한 서술에서 전쟁 특수가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진다.
-11쪽
남베트남 지원이 한국의 안보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이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국 정부는 왜 대규모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을까? 박정희 대통령의 말처럼 주한미군의 이동과 감축을 막겠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을 구해준 미국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보은의 측면도 존재했다.좀더 중요한 문제는 수면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이 정전협정 직후부터 추진했던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동시 감군 정책이다. 주한 미군 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관할하도록 한 1954년의 ‘한 미 합의의사록’은 미국이 한국군의 유지비를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미국은 재정 부담을 줄이려 한국에 있는 한·미 양군의 감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에 반발했고, 1954년과 1958년 한국군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대가로 한국군의 증강을 요구했다. 1959년에는 라오스 내전에 개입할 의사를 표명하고, 비밀리에 정보기관 책임자 이후락을 라오스에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25쪽

박정희 정부에게 감군은 큰 부담이 됐다. 군축은 가뜩이나 좁은 군대 내의 승진 기회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또다시 한국군의 해외 파병이라는 카드를 내놓았다. 이 카드를 내놓은 건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였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던 박정희를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27쪽

 

미국은 왜?

“당신이 노심초사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차이나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지금은 우리가 이미 꺼버린 전쟁의 촛불을 다시 붙이려고 한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국은 끝없는 전쟁과 정치적인 수렁에 천천히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51쪽)
드골 대통령의 충고에서 나타나듯이 냉전 속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에 대한 강박관념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 전쟁은 동시에 경제를 위한 전쟁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의 확대는 세계적 차원에서 시장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남아시아 시장의 축소는 미국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파트너였던 일본에게는 더욱 민감한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본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고, 동남아시아는 일본 경제의 부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배후지였다. 일본이 35년간 지배했던 한반도에 대해서는 배상하지 않으면서 5년 남짓 점령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배상금을 준 것은 이 때문이었다.
-53~54쪽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 대한 깊은 개입을 주장했다는 점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하고 사회복지 정책의 확대를 추진한 개혁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새로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존슨은 미국 사회 내부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했다. 베트남에서의 승리를 통해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55쪽

구성주의 이론은 전쟁이 발발하게 된 사회구조적 모순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 던 기존의 논의에서 벗어나 ‘정부가 도대체 왜 전쟁을 결정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유사한 위기와 갈등의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어떤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구조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고, 전쟁으로 갈등과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고 결정하는 정책결정자들의 생각을 분석해야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49년의 이듬해인 1950년에는 전쟁이 발발했고, 1967년의 안보 위기는 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1950년 북한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해야만 모든 갈등이 해결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기의 정책결정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적극적 개입을 결정했던 존슨 대통령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국내 정치 문제를 가장 많이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56~57쪽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막상 보호하고 있는 정부는 민주적 정부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추진하는 정전협정에 반대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화가 난 미국 정부는 1952년과 1953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다. 비밀리에 세운 계획은 전쟁 중이라는 점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이유로 실행되지 못했다.
베트남에서도 미국은 지엠이라는 패를 버리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내내 부정적 견해가 올라왔음에도, 그는 매력적이었다. 1960년 초에 열린 국가안보회의 회의에서는 지엠이 ‘이승만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조용하고 매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지엠을 돕기 위해 중앙정보국 요원 에드워드 랜즈데일을 보냈다. 1949년 필리핀에 숨겨져 있던 일본군의 금을 찾는 인디아나 존스 노릇을 했던 그는 필리핀의 농민군들을 진압하고 1953년 12월 미국이 지원하는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 인물이었다. 랜즈데일은 지엠을 막후에서 지원했다.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79~80쪽

 

전쟁의 양상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무슨 교훈을 얻은 것이고, 그 교훈은 베트남전쟁에서 어떻게 작동했는가? 미국은 제대로 된 교훈을 얻은 것인가?
-55쪽

전략촌 건설에 대한 지원은 베트콩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었다. 1962년까지 사이공 정부는 4,000여 개의 전략촌을 만들었고, 베트콩 영향하에 있던 마을 사람들을 전략촌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베트콩들은 전략촌 사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고,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전략촌에서도 발생했다.
착시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국민당의 부패로 인해 중국을 포기했던 미국이었지만, 부패와 독재 속에서도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을 지켜냈던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를 보면서 베트남에서도 동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정부의 변신을 무난하게 이끌었던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를 베트남으로 배치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버거 대사는 5.16 쿠데타로부터 민정 이양, 그리고 경제개발 계획의 실행으로 이어졌던 한국의 경험을 베트남에 이식하려고 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또한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도 이해하지 못했다.
-85쪽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없었다면,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베트남의 정규사단이 17도선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통킹만 사건 이후였다. 
남쪽에서의 투쟁 방향은 대부분 북베트남 공산당의 결정에 의지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제네바 협정과 같이 미국도 합의했던 정치적, 평화적 해결 방안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해결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남쪽에서 일어나는 민중봉기에 의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체적으로 무너질 것으로 보았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는 부패했지만, 물리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타이완의 장제스가 그랬듯이. 한국의 유신 체제가 그랬듯이. 남베트남 정부의 정보부는 무자비한 정치 탄압을 주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쪽 지도부는 이미 1956년 적극적인 군사 투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북베트남 공산당은 1959년까지도 정치적 해결 방식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남쪽의 베트콩은 마오쩌둥식 전술의 채택을 주장한 반면, 북베트남은 군사적 투쟁이 강화될 경우 미국이 더 적극적 으로 개입할 것을 염려했다. 그 결과 1960년 제3차 당대회 직후 남쪽에서 군사 조직이 아니라 인민해방전선이라는 정치적 조직이 수립됐다.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내부 반란으로 남베트남 정부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지만, 그사이 남베트남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89~90쪽

 

이라크전 때와 비슷한, 가난한 집 아들들의 전쟁.

매사추세츠공대의 크리스천 애피 교수는 도대체 누가 참전한 것인가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본질에 접근 하고자 했다. 그는 <노동 계층의 전쟁: 미 전투병과 베트남 Woraing Clas War: American Combat Soldiers and Vietnam)이라는 책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을 분석했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주목할 만한 결론을 도출했다. 미국 역사상 있었던 다른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노동 계층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시기에 징병 연령에 해당되는 젊은이들의 수는 총 2,700만 명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어쩌면 1960년대의 20대는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세대였는지도 모른다. 2,700만 명 중에 약 10퍼센트인 250만 명이 베트남에 갔다. 애피 교수에 따르면 250만 명 중 약 80퍼센트는 노동자 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었다.
또 하나, 지원자의 대부분이 10대였다는 사실이다. 지원자들의 평균 연령은 열아홉 살이었다. 이들에게는 투표권조차 없었다. 미국은 1971년에 가서야 투표 가능 연령이 스물한 살에서 열 여덟 살로 낮아졌다.
-126~127쪽
닉슨 행정부는 북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공격을 통해 미군이 철수한 이후 베트콩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15년간 베트남에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수행했음에도 베트남의 민심을 전혀 읽지 못했다. 베트콩의 근본적 기반은 북베트남이 아니라 남베트남 사람들이었다. 미국은 또한 이 전쟁의 본질을 한국전쟁과 같은 남북 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의 본질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이었다.
-193쪽

반전 운동은 단기적으로 볼 때 정치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이슈들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듯이, 반전 운동은 20세기 후반 새로운 진보를 위한 디딤돌이 됐다. 창조는 통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통제에 대한 반동과 자유로부터 온다. 탈냉전 이후 본격화 된 세계화의 기원이 반전 운동의 지구화로부터 시작됐다는 것 역시 또 다른 역설이다. 백인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려고 했다는 비난을 받은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풀 월드’가 베트남 전쟁의 이 면을 보여주는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주제곡으로 나왔다는 역설과 함께. 
-206~207쪽

 

베트남과 중국.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는 중국의 내전 시기(1945~1949) 국민당의 공세를 피해 중국 공산당의 남광둥 제1연대가 베트남으로 피신하는 등 호찌민이 중국에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 중국의 적극적 도움을 통해 호찌민의 군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사실(1953~1954)과 무관하지 않았다. 
우호적 관계는 1954년의 제네바 회의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호찌민은 디엔비엔푸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베트남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했다. 중국은 달랐다. 한국전쟁으로 미룬 혁명 수행을 위해서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오랜 기간 계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우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호찌민은 중국의 입장을 받아들여 17도선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의 분단과 함께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독립 인정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중화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 심리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1950년대 후반까지도 베트남의 통일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토지개혁과 재건 과정에서 중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북베트남은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9년에 가서야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반정부 세력의 무력투쟁 방침을 승인하는데, 이 과정에서는 중국의 노선 변화도 중요한 배경이 됐다. 즉 1950년대 후반 중소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이 베트남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자 중국은 국제적으로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다.
-70~71쪽

 

한국군의 전쟁

한국군의 재판 기록을 보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 행위가 발생했는데, 이 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 치상 523 건 등이 있다. 아마도 민간인 학살 사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트남 정부는 정치국 산하에 전쟁범죄조사위원회를 설치했고, 여기에서 198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건이 발간됐다. 이후 각 성은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징용과 위안부 관련 사실이 해방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사회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101쪽

베트남 사람들이 반발한다면, 한국군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군에게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당시 한국군 사령부에 있었던 한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1967년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까지는 한국군 희생자를 최소화하라는 한국 정부의 지시는 또 다른 딜레마였다.
한국군에게는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용병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이미지는 너무도 중요했다. 한국에서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이 유엔군 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이 겸임)에게 있었지만, 베트남에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국군 지휘관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미군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군의 투입을 통해 미군의 피해를 줄이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작전지휘권이 필요했다.
-135쪽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66년 초 브라운 각서는 전투부대 파병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군사원조뿐만 아니라 경제 원조를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단지 돈만은 아니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 한반도 유사시 미군의 자동개입 조항을 넣어줄 것, 주한미군 주둔군 지위 협정을 맺어줄 것, 그리고 주한미군 감축을 중지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존슨 행정부의 대답은 자동개입 조항은 불가, 주둔군 지위 협정은 필리핀 수준으로 가능, 주한미군 감축 시 한국 정부에 사전 협의 가능이었다. 한국 정부는 더 이상의 양보를 받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미국의 원조를 더 받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국 정부가 꺼낸 카드는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수출 물량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40~42쪽

 

파병 그 이후.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성장은 눈부신 것이었고, 이들 기업은 베트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진출했다. 
처음 베트남에 진출한 것은 1965년이었지만, 본격적인 공사 도급은 1966년 시작됐다. 이때 진출한 기업이 현대건설, 대림산업, 공영전업, 부흥건설, 삼환기업이었다. 가장 큰 혜택을 본 기업은 현대였다. 현대는 베트남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이로 발을 넓혀 고속도로 공사를 따냈다. 1967년부터는 모두 열한 개 회사가 베트남에서 갖가지 공사 도급 및 시공에 열을 올렸다. 타이의 고속도로를 제외한 나머지 공사는 대부분 미군 기지와 관련된 공사였고, 이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결과였다.
미국에 대한 수출도 증가했다. 1964년까지 한국의 제1수출국은 일본이었다(1964년 전체 수출액의 32.1퍼센트). 그런데 1965년 전투병을 파병한 직후부터 대미 수출이 대일 수출을 초과하여 1972년 한국군이 마지막 주둔하고 있을 때까지 대미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5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늘어났다.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10대 재벌 순위가 바뀌었다. 1966년 재벌 순위는 삼성, 삼호, 삼양, 개풍, 판본, 럭키, 대한, 동양, 화신, 한국글라스 차례였다. 1950년대 원조를 이용한 삼백산업으로 급부상한 방직공업과 유통산업이 그 중심에 있었다.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10대 재벌 안에 살아남은 것은 삼성과 럭키뿐이었다. 1975년 10대 재벌에는 현대, 한진, 효성, 쌍용, 대우, 동양맥주, 동아전설(구 충남토건), 신동아 등이 새롭게 등장했으며, 이들은 베트남전쟁 당시 용역과 건설, 무역 등으로 성장한 기업이었다.
-223-224쪽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음을 선언했다. 달러의 기축통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닉슨의 결정은 한국 경제에 결정타가 됐다. 미국은 한국의 가장 큰 수출대상국이었다. 그런데 닉슨 행정부에 와서 수입부가세가 신설됐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 예외조항을 주었던 면직물 수출에도 쿼터 시스템을 도입했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 한미 간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주한미군 1개 사단 철수 문제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면직물 퀴터 도입 역시 주한미군 못지않은 중요한 현안이었다.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 수출에 집중했던 한국으로서는 이제 새로운 분야의 수출 품목을 찾아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1969년의 부실기업 위기와 1972년의 8.3조치 역시 미국발 경제 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1973년의 중화학공업화 선언도 미국의 무역 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187쪽

전쟁 특수의 또 다른 측면은 한국의 산업구조를 바꾸어놓은 것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가 계획했던 중화학공업과 종합기계공업의 발전은 미미한 상태였다. 선진국들은 한국이 선진국의 중화학공업에 의존하는, 국제적 분업에 충실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 군사정부의 야심찬 계획에 반대 하면서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을 중심으로 한 계획의 필요성을 강조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참여했던 로버트 코머의 권고안은 그 대표적 경우였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국 정부는 중화학공업과 종합 기계산업 건설이라는 계획을 부활시킬 기회를 잡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국 정부한테 무기를 제조할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인해 한국 정부에 ‘부채’를 안고 있었던 닉슨 행정부는 한국 정부가 M16 소총을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한국의 무기 생산이 동북아시아 군비경쟁을 촉발해서 안보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염려했던 미국 정부였지만, 한국군의 현대화를 미군 감축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었던 터라 한국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무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중공업이 육성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하기 이전에 이미 한국 정부는 무기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육성 계획을 마련하고 있었으며, 1970년 이미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가 설치됐다. 전투부대 파병을 대가로 존슨 대통령이 선물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의 설립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쟁 특수였다. 군수산업을 배우기 위해 1970년대를 통해 영국, 타이완, 이스라엘 등에 전문가들이 파견됐으며, 일본의 기술자들이 직접 한국에 머무르며 군수산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227-228쪽

베트남 파병 기간에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변화는 현재 한국 사회의 원형을 제공했다. 특히 주민등록제도를 통해 모든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고 강화된 병역 제도와 예비군 제도를 통해 언제든지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병영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통제가 일방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밑으로부터의 동의도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 특수와 그를 통한 경제 성장과 산업화는 대중들의 동의를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18~219 쪽

한국과 타이, 필리핀은 왜 동일한 시기에 독재 체제의 성립과 강화를 경험해야 했는가? 세 나라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쿠데타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내세웠던 주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닉슨 독트린 이후에 형성된 데탕트가 이들에게 위기가 됐다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확대해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이를 통해 데탕트의 상황 아래서 중립화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한국과 같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1971년부터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1972년에는 통일의 원칙을 확인한 7.4 공동성명이 발표됐다는 점에서 고려해볼 만한 대안이었다.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는 닉슨 행정부도 바라는 바였다. 타이와 필리핀 역시 위치적으로 중립화 선언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3국의 정부가 선택한 방식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독재 체제의 수립과 사회 통제의 강화였다. 외부적 위기가 곧 정권의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74-275쪽

1970년대는 한국 사람들에게 중요하면서도 특이한 시대였다.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서 1970년대만큼 큰 변화를 느끼게 했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의 변화는 오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만든 그 기원이 됐기에 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295쪽

 

북쪽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 그리고 학문의 중심인 하노이와 달리 호찌민을 환락과 천박함의 상징으로 여겼다. 남쪽 사람들은 다이내믹한 호찌민에 비해 하노이를 이상하고 지루한 곳이라고 여긴다. 남쪽 사람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외식을 한다. 북쪽 사람들은 검소하며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북쪽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 더 비싼 오토바이를 사는 반면, 남쪽 사람들은 싼 오토바이를 두 대 산다. 호찌민 사람들이 ‘아니요’라고 할 때 하노이 사람들은 '글쎄요'라고 말한다. (330쪽)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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