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현지시각) AP통신과 인터뷰를 하면서 동성애를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신은 모든 자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했고,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한다. 형사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를 구분하면서, 동성애가 종교적 즉 기독교 관점에서는 죄악일지 몰라도 세속법으로 형사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교황은 동성애를 범죄로 다루는 법이 “부당하다”며 가톨릭교회가 이런 법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도 말했다.
동성결혼을 ‘시민결합’ 등의 형식으로 인정해서 배우자로서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곳들이 늘고 있지만, 동성애 지향을 갖고 있거나 그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범죄자로 처벌하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AP에 따르면 현재 67개국이 동성애를 법적으로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11곳에서는 사형 선고까지 내릴 수 있게 돼 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사형 위협을 받고 외국에 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 한국에 와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도 있었다.
동성애를 범죄로 보는 나라는 이슬람권과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이지만 러시아도 2012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재집권한 뒤 성소수자 처벌을 강화했다. 작년 말 푸틴이 서명한 'LGBT 선전에 관한 법률'은 성소수자임을 밝히거나 성소수자 문제를 공개 언급하는 것도 범죄로 규정했다. 형사 처벌을 하지 않는 곳에서도 성소수자를 낙인찍고 괴롭히고 폭력을 저지르는 일은 많다. 교황의 발언 뒤에는 그런 인권탄압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11일 즉위했으니, 곧 10년이 된다. 그는 늘 마이너리티들에게 애정을 보여왔고 이번 발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가톨릭국가인 아르헨티나에서 신부들이 미혼모가 낳은 자녀들에게 세례를 해주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교 시절에 그런 신부들을 ‘위선자들’이라고 일갈한 일은 유명하다. 즉위 뒤 이탈리아의 난민 기착지를 맨 먼저 방문한 것, 시리아 난민들을 바티칸 주민으로 받아들인 것, 인신매매 피해자들이나 노예노동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을 편든 것 등등도 그렇고.
성소수자 문제에서도 이전 가톨릭 지도부와는 태도가 달랐다. “동성애자인 사람이라도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 즉위 첫 해 브라질 순방 뒤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었다. 미국 최대 성소수자 잡지인 ‘애드버케이트’는 프란치스코를 그 해의 인물로 선정하고 표지에 실었다.
교황청은 1968년 인공적인 산아제한을 금한다는 교칙을 발표했다. 가톨릭 신자들 중에도 당연히 피임을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전임 교황 베네딕토16세는 유독 보수파였다. 명품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가지가지로 마음에 안 들던 베네딕토... 2009년에 베네딕토가 아프리카를 순방했는데, 콘돔도 써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더 퍼지는 걸 막기 위해 구호개발기구들이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느라고 오랫동안 애써왔는데 베네딕토는 아주 그냥 찬물을 확 끼얹었다.
'차별'을 '보수'로 포장하는 자들이 대개 그렇듯, 베네딕토는 특히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동성애자들은 “정신적인 악을 타고났다”고까지 했다. 그뿐인가. 아동 성추행과 성학대를 저지른 사제들을 너무 강하게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조직이 흔들린다고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가 더욱 두드러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성소수자 권익에 적대적이고 결혼과 가정 문제에서 고루하기 짝이 없는 로마 가톨릭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프란치스코 즉위 첫해에 바티칸이 전세계 가톨릭 교구를 대상으로 동성애와 이혼, 피임과 낙태 등의 이슈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의견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고, 변화의 기대가 일었다. 1년 지나 2014년 10월 바티칸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열렸다. ‘시노드’라고 부르는 이 행사는 가톨릭 지도부가 총집결하는 자리다. 2주 동안 최고위 성직자들이 모여서 그간 가톨릭이 금기시해왔던 주제들을 놓고 토론했다. 하지만 그 후 바티칸의 방침이나 교리 해석에 큰 변화는 없었다.
2020년 10월 이탈리아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프란치스코’가 개봉됐다. 이 다큐에 교황이 “동성애자들도 가족 안에서 권리를 갖고 있다”며 “시민결합(civil union)법을 만들어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교황 발언은 곧바로 가톨릭 내에서 반작용을 불렀다. 교계 보수파들은 비판 성명을 냈다. 보수파는 2003년 바티칸이 만든 ‘신앙 교리에 관한 회칙’을 근거로 들이밀었다. 이 회칙에는 “동성결합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흐름에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결국 교황은 뒤로 물러섰다. 2021년 바티칸은 동성결합을 가톨릭교회가 축복할 수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National Catholic Reporter] After 10 years of being patient, Pope Francis is entitled to be less so
이혼도 안 되고 피임도 안 되고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논리가 일반 사람들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공론화한 것은 가톨릭 전체의 변화라기보다는 프란치스코의 개인적 결단이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아르헨티나의 빈민들을 보듬으며 사제 생활을 해온 교황은 늘 “가난한 이들의 삶을 살피라”고 말해왔다. 사제들이 낙태·피임·동성애 같은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치유와 위로라는 임무는 소홀히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톨릭 전체에서 고위 사제들이 교황과 모두 뜻을 같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황이 전향적인 발언을 하거나 개혁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반발이 장난 아니다.
올해는 좀 달라질까? 작년 마지막날 베네딕토16세가 선종했다. 독일 출신인 베네딕토는 가톨릭 보수파, 유럽파의 대표였다. 반면 프란치스코는 첫 라틴아메리카 출신 교황에 교계 개혁파를 대변한다. 베네딕토가 떠난 후 프란치스코가 처음으로 한 인터뷰에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범죄시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이 나왔다. 미국의 진보적 가톨릭매체 '내셔널가톨릭리포터'는 “바티칸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인가”라고 적었다.
베네딕토의 비서였던 게오르그 갠스바인 대주교 등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를 비판해온 반대파들이 건재했던 까닭에 바티칸에서 교황은 뭐든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떠났고, 올해는 프란치스코 즉위 10년이다. 변화를 본격 추구하려는 거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올해 10월 시노드의 분위기가 가늠자가 될 수 있다. 과거 요한바오로2세 교황 시절 바티칸에서 개혁의 목소리를 냈던 영국 출신의 도미니카 수도회 성직자 티머시 래드클리프가 2015년부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를 맡고 있다. 그 외에 교황청의 주요 직책들은 교계에서 보수적인 것으로 꼽히는 ‘앵글로’ 사제들이 여전히 차지하고 있다. 교황이 그들을 더 개혁적인 이탈리아나 라틴아메리카 성직자들로 대체할지가 관심사다. 10년을 참고 기다렸는데... 자신을 대놓고 욕하던 베네딕토16세 파벌 성직자들에게도 늘 너그러웠고 말이다. 다만 1936년생 교황은 이미 86세라, 변화를 일으키려 해도 건강이 뒷받침돼야 할 것 같다.
(여성 사제를 거부하는 한, 가톨릭은 세상에 답을 내놓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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