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 돌아온 룰라, 그때와 지금의 브라질

딸기21 2023. 1. 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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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1일 취임했다. 2000년대 2번 연임, 이번이 3번째 집권이다. 지난해 10월 노동자당(PT) 후보로 다시 대선에 나와 자이르 보우소나루 당시 대통령에게 승리했고 보우소나루는 지난해 말 미국으로 떠나서 새 대통령 취임식에도 안 왔다고 한다.


1945년생이고 상파울루 노동자 출신이다. 1970년대 말 브라질 군사독재 기간에 노조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1980년 군사독재정권이 끝난 뒤 노동자당 창당 주역이 됐다. 1986년 상파울루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1989년, 1994년, 1998년 대선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 그래도 1990년대 브라질 대통령은 종속이론가인 좌파 지식인 엥히케 카르도주였고, 그 시절에 노동자당은 브라질 정치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룰라도 정치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2003년 마침내 대통령 취임. 2007년 재선돼서 2010년까지 집권했다.

재임 시절 인기가 정말 많았다. 2000년대에 미국이 대테러전을 연달아 벌이면서 국제사회의 반감이 극에 달했을 때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같은 거대신흥국들은 '브릭스(BRICS)'라 불리며 위상을 한껏 높였다. 브라질의 룰라가 그 주역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도 룰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지율이 60%대면 급락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두 차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때 지지율이 80%였다.

보우사 파밀리아(빈곤가정 지원) 같은 빈민/서민 지원프로그램들로 격차를 줄이고 빈곤율을 낮추는 확실한 성과를 거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룰라 시절 브라질에서 2000만명이 빈곤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동사망률은 낮아졌고 문자해독률은 올라갔다. 최저임금과 평균소득은 증가했다. 대학과 보건의료의 접근성도 높아졌다.

 


하지만 그후 노동자당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룰라 다음에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이 2번 연임했지만 룰라 시절의 인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노동자당 정권이 십수년에 이르면서 중산층이 늘어나고 보건교육인프라가 확충됐지만, 그만큼 더 수준이 높아진 시민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거기에 '고인물'에 대한 피로감이 커졌고, 호세프의 인기 없는 캐릭터가 겹쳐졌다.

브라질 연방의회는 여러 정당들로 쪼개져 있고, 한 정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고질적으로 불안정한 구조다. 대통령이 정책을 추진하려면 정치적 당근을 주거나 야합할 수밖에 없다. 한때 호세프 편에 섰던 썩어빠진 우파 정치인들은 부패 수사를 무마해달라고 호세프에게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의회 쿠데타로 호세프는 쫓겨나고 정치혼란이 이어졌다. 그 뒤 보우소나루가 집권했던 것이고.

브라질의 검찰 권력도 장난 아니었다. 룰라도 석연찮은 이유로 부패 죄로 기소돼 10년 가까운 징역형을 선고받고 1년 반 동안 복역했다. 하지만 2021년 3월 연방대법원이 룰라의 모든 유죄판결은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정치적으로 복권됐고, 지난해 대선에 다시 나와 브라질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됐다.

 


취임연설에서 룰라는 보우소나루 집권 기간 브라질이 “끔찍한 폐허”가 됐다고 비판했다. 다시 늘어난 빈곤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는데, 감성이든 제스처이든 원래 잘 웃고 잘 우는 걸로 유명한 정치인이긴 하다.

룰라의 취임선서의 핵심 메시지는 통합과 재건이었다. 브라질은 보우소나루 집권 시절 아마존 삼림파괴, 원주민 인권 탄압 등으로 악명을 떨치며 세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보우소나루는 코로나19에 말라리아약을 처방하라면서 보건장관을 줄줄이 쫓아내 방역을 초토화했으며 결국 3600만명 감염되고 70만명이 사망했다. 룰라는 교육, 보건,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 등을 강조하면서 보우소나루 시절의 정책들을 대거 뒤집을 것으로 예상된다. 취임하자마자 의회는 룰라 정부의 대규모 사회지출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정치적 분열이 심해 앞길이 평탄치는 않을 것 같다. 룰라의 결선투표 득표율은 50.8%, 진짜 박빙이었다. 룰라가 다시 나왔다는 것은 노동자당에 새 인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아직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것처럼, 브라질에서도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반발이 적잖게 남아 있다. 그들이 소동을 피울까봐 취임식장 주변에 경찰 8000명이 배치됐었다고 한다. 지난해 말에는 폭발물을 설치하려던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이 체포되기도 했다. 일부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다면서 격렬 시위를 벌였다.

 


경제는 지금 어떨까. 브라질은 인구 2억2000만명에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이고 1인당 실질GDP는 2020년 기준 1만4000달러 선이었다. 경제성장률은 팬데믹 이전에도 몇 년 간 1%대로 침체 상태였다. 팬데믹 직전 실업률이 12%였으니 상황은 안 좋다. 24세 이하 청년실업률은 30% 육박한다.

[포브스] Brazil GDP Per Capita And Its Worst Years

지금 세계에 경제가 좋은 나라 없다지만, 브라질은 몇년 간 특히 기복이 심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만 해도 다른 나라들보다 피해가 적었는데 2010년대 중반 1인당 GDP가 툭툭 떨어졌다. 정치불안 탓도 있었지만 에너지값이라는 구조적인 요인이 있었다. 과거 노동자당 집권 시절 브라질이 빈곤을 줄이고 소득을 늘리는 성과를 거둔 것은 룰라 정부의 정책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라크전 이후 고유가 덕도 컸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부터 기름값이 떨어졌다. 에너지, 철광석, 농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브라질은 경제 타격이 심했다. 이런 근본적, 구조적인 문제를 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의존도도 문제다. 2013년 브라질 전체 수출에서 중국으로 가는 비중은 19.4%였다. 2020년에는 중국이 무려 31.7%를 차지했다. 코로나19로 중국 공장들이 멈추고 중국의 원자재 수요가 줄어드니 브라질은 직격탄을 맞았다. 여전히 국영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누가 맡아 얼마나 버느냐에 재정이 휘둘리는 상황이다. 룰라 정부는 페트로브라스의 가스부문을 팔아 민영화하려던 전임 정부의 정책을 일단 중지시켰는데, 외국 투자자들은 당연히 반발할 법한 조치다. 경제 관련 언론들이나 심지어 한국의 우파 언론들은 늘 그렇듯 빨간 딱지를 붙이면서 '좌파 정부 출범 뒤 브라질 증시 하락'을 보도하고 있다.

Brazil (BRA) Exports, Imports, and Trade Partners | OEC

룰라도 바보는 아니다. 새 내각 면면은 뭐 대단히 특이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눈길 끄는 사람은 있다. 장관이 37명인데 그 중 노동자당 소속은 3분의1도 안 되고 중도우파 브라질연합당, 중도 사회민주당, 브라질민주운동 등 여러 정당에서 발탁했다. 관심 끄는 두 사람은 모두 여성장관인데 첫번째는 환경기후장관 마리나 시우바다. 녹색당 대선후보로도 나왔던 유명한 환경운동가를 선택함으로써 세계에 “아마존을 보존하고 기후대응에 적극 나서겠다”는 메시지를 줬다.

 

굳이 비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마침 이런 자료가... www.thestreet.com


또 한 명은 시모네 테벳 기획재정장관이다. 상원의원을 지내고 작년 대선에 민주운동 후보로 출마해서 3위를 했다. 결선에서는 룰라를 적극 지지했고 새 정부 핵심 요직에 발탁됐다. 젠더 균형, 다양성, 격차 해소, 보전 같은 여러 가치에서 노동자당과 통하지만 경제 문제에서 '보호보다 투자 유치'를 강조하는 성향으로 분석되는 모양이다. 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보우소나루 정부의 경제정책 대부분을 지지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로이터는 투자자들이 일단 테벳 임명을 환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용주의, 중도로 간다는 것 강조하기 위한 인선으로 풀이된다.

로이터, Brazil's Lula gives Marina Silva, Simone Tebet key cabinet roles

하지만 룰라 정부의 경제정책을 둘러싼 갈등은 이미 시작된 듯하다. 리우타임스는 이런 보도를 했다. "룰라 대통령이 국가 차원의 민영화를 취소하고 증시에 큰 손실을 입히고 있는 반면에, 공화당 소속의 타르시시우 지 프라이타스 상파울루 주지사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며 상파울루주 기업의 민영화 연구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상파울루 주가 브라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가 넘는 점을 감안하면, 룰라 정부에는 매우 우려스런 반격이 될 수밖에 없다.

 

www.exportgenius.in


[세계은행] 브라질 주요 지표

룰라의 브라질은 국제사회에서는 역할을 키울 것이다. 집권 시절 그는 남미 좌파뿐 아니라 세계 진보진영의 기수였고, 명망이 높았고,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룰라가 국제무대의 엄청난 스타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2000년대 남미 좌파 바람, 2010년대 우파의 반격을 거쳐 최근 몇년 새 다시 중도/좌파 쪽으로 남미 정치지형이 돌아서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세는 좌우로 설명하기 힘들다. 각국 사정에 따라 제각각이고 좌우의 의미조차 불분명하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룰라의 브라질이 목소리를 많이 낼 것이라는 점이다. 룰라 당선 뒤 외국 언론에 단골로 나오는 표현이 "Brazil is back"이다. 보우소나루 시절의 손가락질 당하던 처지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고, 룰라의 움직임에 관심이 당분간 집중될 것이다.

당장 룰라는 취임사에서 ‘남미의 통합’을 얘기했고 취임 이틀째인 2일 내내 남미 정상들과 통화를 했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맏형으로서 위상을 높이려고 할 것이다. 취임 뒤 첫 외국 방문으로, 이달 중 아르헨티나에 간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와는 전통적 라이벌이자 남미의 형제라는 이중적 관계인데 지금은 아르헨티나에 좌파 정부가 들어서 있으니 나쁠 게 없다.

 

브라질의 주요 경제지표.


그리고 2월 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3월 무렵 중국을 방문하고 4월에는 포르투갈에 찾아갈 거라고 한다. 미국 먼저, 그리고 중국… 어느 편에 서겠다가 아니라 양쪽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것이지만, 굳이 따지면 우선순위는 미국인 셈이다. 좌파라고 하지만 룰라는 과거 집권 시절에도 미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미국은 룰라 집권을 내심 환영하는 듯하다. 일단 보우소나루보다는 믿을 만한 파트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룰라가 취임하자 트위터에 “무역, 안보, 지속가능한 발전과 혁신, 포용에서 양국 강력한 파트너십이 계속되길 기대한다”는 축하 메시지 올렸다.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 등 미국 극우파 정치인들은 남미 ‘사회주의 정권들’을 맹비난하지만 대체로 실용주의 중도 온건성향의 정부들일 뿐이다. 바이든 정부도 이들을 위협으로 여기기보다는 파트너십으로 가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미 주요국들이 자원 수출에서 보조를 맞추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황을 수입국들은 경계할 수 있다.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대통령은 미국이 주도해온 마약과의 전쟁을 끝내자면서 리튬 등 광물자원 개발에서 공동 전략을 추구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거기에다 아르헨에 이어 브라질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으니 남미 협력은 대체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President Luiz Inácio Lula da Silva, right, poses for a photo with Chile’s President Gabriel Boric after he was sworn in as president at the Planalto Palace in Brasilia, Brazil, January 1, 2023. AP


각국 내부 사정들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극도로 분열돼 있는 지금, 룰라가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 블링컨 장관이 3일 브라질의 마우로 비에이라 신임 외교장관과 통화하면서 룰라의 워싱턴 방문 일정을 논의했는데, 베네수엘라 얘기도 나왔다고 한다. 미국과 베네수엘라는 극도로 적대적인 관계이지만 바이든 정부가 조금씩 고삐를 풀어주고 있다. 중간에서 브라질이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는 듯하다.

룰라는 취임 직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축하사절들도 만났고 전쟁을 끝내라 호소했다. 여기저기 중재할 사안들을 찾아보면 많지만 과연 룰라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지가 문제다. 일단 외부의 기대는 높은가 보다. 이른 시일 내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브라질에 갈지 모른다는데, 이래저래 룰라는 언제나 주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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