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우크라이나, 팜유와 밀가루

딸기21 2022. 3. 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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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alm oil plantation is pictured next to a burnt forest near Banjarmasin in South Kalimantan province, Indonesia, September 29, 2019. REUTERS

 

팜유Palm oil. 이름 그대로 팜(기름야자)의 열매에서 뽑아낸 기름이다. 빵을 만들 때 버터 대신 쓰기도 하고, 식용유로 쓰기도 한다. 제조업에도 널리 쓰인다. 비스킷, 초콜릿, 비누와 세제 등 온갖 다양한 상품에 팜유가 들어간다. 해마다 7000만~8000만 톤의 팜유가 생산되는데 생산과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다. 세계 수출량의 60% 정도를 인도네시아가 차지한다. 팜유는 석유보다 탄소배출량이 적어 바이오디젤 원료로 쓰이는데, 정작 보르네오 섬은 팜 농장들이 늘면서 숲이 사라져간다. 환경단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17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팜유 수출세를 대폭 올렸다. 선적할 때마다 수출세를 내는데 거기에 별도로 수출부담금을 매기고, 누진율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자국 수출업자들에게 타격을 줄 게 뻔한 이런 조치를 취한 이유는 식용유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산 팜유의 3분의2가 외국으로 팔려가는데, 세금을 올려 일단 수출을 억제해보겠다는 것이다. 생산량 가운데 국내시장에서 의무적으로 팔아야 하는 양도 20%에서 30%로 늘렸다. 

 

[로이터] Indonesia hikes palm oil export levy amid accusations of 'policy panic'


팜유 생산업자들은 반발했고, 일부 의원들은 정부가 규정을 올들어 6번이나 바꾸는 바람에 시장에 패닉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면 정부는 국제 원자재가 상승 탓이 크며 '마피아와 투기꾼'들의 팜유 투기 거래에 화살을 돌렸다. 일리는 있다. 팜유 가격은 올들어 50% 넘게 올랐는데, 거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식용유의 주된 공급국인데 제재와 전쟁으로 그쪽의 유채씨기름과 해바라기유 수출이 줄어드니 머나먼 팜유대국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식용유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FAO

 
식용유값이 걱정인 인도네시아는 그래도 낫다. 오랜 내전에 시달린 시리아 사람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숨겨진 최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여전히 시리아에서 1340만명이 식량불안을 겪고 있다. 지난해 말 유엔은 시리아에 가뭄까지 겹치면서 밀 생산량이 줄어 160만톤이 모자랄 것으로 봤다. 

 

시리아인들은 10년 넘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맞선 싸움을 벌였으나 아사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반정부군을 진압하고 권력을 연장했다. 그런데 이제는 러시아가 일으킨 동유럽의 전쟁 때문에 시리아인들의 고통이 추가될 판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정부는 2022년에 100만 톤의 밀을 수입하기로 러시아와 합의했다. 재정난이 심해 그 돈도 러시아가 차관을 대주기로 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밀 수입 협상이 중단됐다. 

 

2월 24일 시리아 정부는 연료값 인상과 필수 식료품과 생필품 부족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들을 발표했다. 밀과 연료 구매량을 제한하고, 일부 배급제를 실시하고, 밀 수입에 재정을 우선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시리아 북부 지역은 주로 터키를 통해 밀과 밀가루를 공급받아왔는데 터키는 밀의 90%를 우크라이나로부터 수입하는 나라다. 

 

 

[WFP] Syria Emergency Dashboard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식량위기가 가중될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식량 가격은 2월에 사상 최고치로 올라 전년 동기 대비 20.7%의 상승을 기록했다. 전쟁에 따른 식량공급망 교란은 여기저기서 시작됐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세계 5위 밀 수출국이었다. 1위는 러시아이고 이어 미국, 캐나다, 프랑스, 우크라이나 순이다. 밀을 포함해 곡물 전체로 보면 러시아가 3위, 우크라이나가 4위 수출국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급하는 밀과 보리가 세계 교역량의 3분의 1에 이른다. 

 

그런데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했다. 전시 식량을 비축해야 하는 우크라이나는 밀과 기장과 귀리 등 곡물의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미 계약돼 외국으로 보내야 하는 곡물이 있지만 러시아군이 수출항들을 봉쇄했다.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의 거의 80%가 남서부 항구인 오데사, 피우데니, 미콜라이우, 초르노모르스크를 통해 흑해로 나간다. 하지만 2월 24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 곡물 수출은 사실상 중단됐다. 일례로 오데사는 러시아 군함이 장악해 화물선 출항을 막고 있다.

 

[FAO] World Food Situation


세계식량계획WFP은 우크라이나의 다리와 기차 등 주요 인프라가 폭탄에 부서지고 식량공급망이 붕괴되고 있다고 말한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곡물 작황은 기록적으로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지난해 가을 심은 겨울밀에 쓸 비료가 모자라고, 설비를 돌릴 연료도 부족하다. 옥수수와 보리는 다음달에 심어야 하는데 폭격이 걱정돼 농사를 짓기도 힘들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국민들이 먹을 1년치 곡물과 식량을 갖고 있지만, 전쟁이 계속되면 세계에 수출을 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러시아의 침공에 따른 식량시장의 교란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Grain storage outside of Lviv, Ukraine. PHOTO: JUSTYNA MIELNIKIEWICZ/MAPS FOR THE WALL STREET JOURNAL


우크라이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세르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주변 동유럽국들도 불안해져서 잇달아 곡물 수출을 막거나 줄였다.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는 생산에 차질을 빚을 일이 없지만 시장이 러시아산 곡물을 거부하고 있다. 식품은 제재 대상이 아님에도 무역상들과 금융기관들이 러시아와의 교역을 줄인 것이다. 곡물을 팔려 해도 선박 보험료가 이례적으로 높아졌다. 곡물데이터를 분석하는 애그플로AgFlow는 3월 첫 2주 동안 러시아 항구를 떠난 곡물 수출선박이 73척에 그친 것으로 봤다. 전년 같은 기간에는 220척이었다. 

 

[WSJ] War in Ukraine Is Already Taking Its Toll on Global Food Supplies


미국 시카고 상품거래소의 밀 선물가격은 올 들어 60% 안팎으로 올랐다. 거기에 더해 세계 중국마저 기상조건이 나빠 밀 생산량이 평년보다 20%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가격급등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66억달러 규모의 농업보조금을 추가로 배정했다. 중국은 세계 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비된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밀가루가 모자라지는 않더라도, 밀의 국제 가격이 중국 내의 수급균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설상가상 미국의 평원도 곳곳이 가뭄을 맞고 있다. 그나마 호주와 인도, 캐나다의 수확량이 좋을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의 밀 교역량은 올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제재로 천연가스 값이 오르면, 비료 생산이 줄면서 세계 곡물 생산량이 더 줄어들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지난 4일 러시아 경제개발장관은 서방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에 대한 대응으로 비료 수출을 중단하는 방안을 꺼내들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식량 불안은 발등의 불이다. 수입량으로 보면 우크라이나산 밀을 주로 사가는 나라는 이집트, 인도네시아, 필리핀, 터키, 튀니지 등인데 수입 의존도를 놓고 보면 중동-북아프리카가 특히 심하다. 이 지역에는 빵 같은 기본 식료품에 정부가 보조금을 대주는 나라들이 많다. 그런데 원재료값이 너무 오르면 정부가 보조금으로 낮은 가격을 지탱해주기 힘들어진다. 빵값이 기폭제가 돼 널리 퍼져 있는 정치적 불만이 터져나오는 일이 잦은 이유가 그것이다. 

 

[알자지라] MENA faces a crisis as the world’s key wheat producers are at war

 


세계 최대 밀 수입국인 이집트에서는 인구 대부분인 7000만명이 정부의 식료품 보조금 혜택을 받고 있다. 2월 23일 모스타파 마드불리 총리는 현재 밀 비축량이 4개월치이고, 4월 중순 국내산 밀이 수확되면 비축량이 9개월치로 늘어난다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정부는 식료품 보조금을 계속 줄이고 있다. 지난해 7월 식용유 보조금을 줄였고, 이어 빵 보조금도 없애겠다고 했으나 반발이 예상되자 발표를 미뤘다. 

 

[Atlantic Council] Putin’s invasion of Ukraine threatens a global wheat crisis

 

이집트에서는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가 식량보조금을 끊자 ‘빵 폭동’이 일어난 전례가 있다. 2011년에는 튀니지에서부터 시작된 ‘아랍의 봄’ 혁명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뒤흔들었는데, 당시 상황도 식료품값이 폭등한 것과 이어져 있었다. 미국 애틀랜틱카운슬의 경제전문가 닐스 그레이엄은 최근의 식품가격 상승세가 아랍의 봄 때보다 더 심하다면서 “밀 공급의 8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해온 이집트의 경우 정부 지출이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A harvester gathers wheat from a field near the Krasne village in Ukraine's Chernihiv area [File: Anatolii Stepanov/FAO via AFP]

 

[알자지라] Lebanese fearful as fuel and wheat shortage deepens


레바논 상황은 더 심각하다. 레바논 세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전체 밀 수입량의 80%는 우크라이나에서, 15%는 러시아에서 왔다. 그런데 그 해 8월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일어나 넉 달 치 밀 비축량이 날아갔다. 코로나19가 번지고 관광산업이 무너지면서 레바논 인구의 80%가 빈곤에 시달리게 됐다. 

 

[휴먼라이츠워치] Russia’s Invasion of Ukraine Exacerbates Hunger in Middle East, North Africa

 

정부는 지난해 3월부터 세계은행의 도움을 받아 비상사회안전망(Emergency Social Safety Net)이라는 이름으로 극빈층에 현금을 내주는 등 취약층 보호에 안간힘을 써왔다. 지금도 매달 2000만달러를 밀 구입 보조금으로 쏟아붓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계에 부딪쳤다. 캐나다, 호주, 미국산 밀을 수입하려 애쓰고 있지만 재정난이 발목을 잡는다. 레바논 경제장관은 지난 5일 트위터에 밀 배급제를 시작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충돌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사는 1000만명이 식량 수급불안을 겪을 것”이라며 “식량공급망이 글로벌화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글로벌 연대가 필요하다”고 국제 공동대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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