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피노체트 헌법과 칠레의 싸움

딸기21 2022. 5. 21. 09:00
728x90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는 칠레 북부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의 항구 도시다. 수도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1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스페인에 맞선 독립전쟁 당시에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칠레는 19세기 말 '태평양 전쟁'으로 이 지역을 장악했고, 1904년 '평화우호조약'을 통해 분쟁을 끝냈다. 은과 질산칼륨 광산을 주변에 둔 주요 수출항이기도 하지만 칠레 입장에선 독립과 영토 주권에 관련된 의미 깊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엔 후안차카가 있다.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Quechua) 말로 '슬픔의 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면 마치 고대의 석조사원처럼 보이는 웅장한 건물이 버려진 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은 고대의 성채나 사원이 아니라 19세기 은 주조공장의 잔해다. 콜롬버스가 이른바 '신대륙'에 도착한 이래로 남미의 은은 유럽의 제국들을 먹여살리는 수단이었다. 그 번영의 그늘에는 남미 원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 있었다. 루이나스 데 후안차카(Ruinas de Huanchaca), ‘후안차카의 폐허’는 그런 과거의 상징인 셈이다.

 

루이나스 데 후안차카(Ruinas de Huanchaca). dadapilan.com

 

지금은 '아타카마 사막 박물관'을 포함한 문화공원지구로 바뀐 이 유적지에서 지난 15일 마리아 엘리사 킨테로스 제헌의회 의장은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민주적으로 만들어진 헌법 초안"을 공개했다. 제헌의회는 지난해 10월부터 옛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할 새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이제 문안을 다듬고 헌법의 머릿말인 전문을 쓰는 작업에 들어간다. 새 헌법은 오는 9월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다.

 

시장 지상주의에서 인권과 사회적 권리 쪽으로 초점을 이동시킨 역사적인 헌법이라고 제헌의회는 강조한다. 킨테로스는 “우리는 교육, 주택, 일,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더 정의로운 칠레를 건설하기 시작할 것” “모든 사람들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 서로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칠레의 마그나카르타라 불리는 헌법 초안은 원주민 자치를 늘리고 환경권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고,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의 의무로 명시했다. 상원은 '지역회의'로 바꿔 엘리트 중심 정치구조를 뜯어고치기로 했다.

 

Maria Elisa Quinteros, president of Chile's constitutional assembly, presents the draft of the new constitution during a ceremony at the Huanchaca ruins in Antofagasta, Chile May 16, 2022. REUTERS

 

세계 최초의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진 뒤 칠레 사람들은 어느 나라보다 잔혹한 독재권력의 횡포를 겪었다. 반정부 지식인, 학생들의 탄압, 납치, 고문, 살해, 투옥 등등 그 시절 제3세계 군부독재정권들의 고전적인 수법이 칠레를 뒤덮었다. 그런 상처는 사라지지 않은 채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흔적을 남긴다. 게다가 피노체트는 단죄를 받지도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피노체트 시대가 남긴 또 다른 상처는 그 후 한 세대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뒤엎은 사회경제적인 폭력과 수탈의 구조다. ‘시장’이 다 알아서 할테니 정부들은 국민들의 삶에서 손을 떼라며 기간시설을 민간에 팔아넘기게 하고 미국 등 서방 자본이 들어가 광산에서 금융까지 멋대로 주무르게 만든 신자유주의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곳이 칠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는 미국 ‘시카고 학파’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피노체트의 친구였고,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칠레 학자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착취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 시카고대학을 모델로 한 칠레의 대학들을 나온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들이 재무관료직을 차지하고 구리 광산 등 국가의 자산을 외국에 팔아넘겼다. 캐나다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독트린>에서 피노체트 시절의 칠레와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의 인도네시아가 1970~90년대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 됐던 과정을 상세히 적고 있다.

 

Constitutional assembly members begin formally debating the motions for a new Constitution, in Santiago, Chile, February 15, 2022. REUTERS

 

민주화가 이뤄지고, 과거 피노체트의 탱크에 짓밟혔던 산티아고의 ‘라모네다’ 대통령궁 주인은 주기적으로 바뀌었다. 그 중에는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도 있었다. 그러나 피노체트의 유산, 그 중에서도 1980년 헌법에 규정된 억압적이고 불공정한 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2005년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시절 개헌을 했지만 피노체트 헌법의 틀은 유지됐다.

 

2019년 10월, 수도 산티아고에서 지하철 요금이 오르자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후 3년 동안 이어진 '에스탈리도 소시알(사회의 폭발)'의 시작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지하철역들을 점령하고 '카라비네로스'라 불리는 권위적인 경찰조직과 대치하며 '요금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어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방화와 파괴를 비롯한 격렬한 시위에 나섰다. 발파라이소, 콘셉시온, 라세레나, 아리카, 이키케, 칠란... 전국으로 시위가 번져나갔고 안토파가스타도 예외는 아니었다.

 

Chile's most massive march (Image from 25 October 2019).

 

세바스티안 피녜라 당시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산티아고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소했다. 하지만 피노체트 말기의 민주화 시위 이래 최대 규모로 일어난 시민들의 봉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상대로 신체 훼손과 고문, 성폭행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피녜라는 군부독재 정권과 거리가 있는 사업가 출신 정치인이지만 그의 정부가 시위대에 맞서 쓴 억압조치들은 군부독재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피녜라는 '서방 자본가' 이미지가 겹쳐진 인물이기도 했다. 대통령이 물러나라며 100만명 이상이 거리로 나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메르코프레스] Chile's Constitutional Convention releases draft

 

CIA World Factbook

 

칠레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에서 그치지 않고 더 큰 변화를 요구했다. 지하철 표를 살 돈도 없을 정도로 서민들을 가난하게 만든, 국가의 부를 기득권 엘리트들이 독차지하게 만든 구조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2020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칠레인들은 80% 가까운 찬성으로 새 헌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조문 몇 개를 바꾸는 개헌이 아니라 아예 새 국가를 세우듯 제헌의회를 꾸리고 헌법을 다시 쓰기로 했다. 지난해 5월 155명의 제헌의회 의원이 선출됐다. 유럽계 기득권층 중심인 의회와 달리 마푸체, 아이마라 등 원주민 대표들이 의석을 확보했으며 전체 ‘남녀 동수’로 구성됐다. 12월 대선에서는 과거 교육개혁 시위를 주도한 경력이 있는 1986년생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번에 공개된 헌법 초안은 499개 조항이다. 제헌의회가 103차례의 총회를 거쳐 만든 것이다. “칠레는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칠레는 다민족적이고 상호문화적, 생태적이다. 칠레는 연대의 공화국이며, 칠레의 민주주의는 대등성의 민주주의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인류의 실질적 평등, 인간과 자연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본질적인 가치로 인정한다.” “국가는 실질적인 평등이라는 조건 하에서 여성, 남성 등등 다양한 성/젠더를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회를 촉진한다.”

모든 국가기관, 공기업과 준 공기업의 구성원은 남녀 동수로 만든다고 한다. 망명신청자나 난민들을 강제추방하는 것은 금지된다. 자발적인 임신중단을 여성의 권리로 보장한다. '법적 다원주의'를 집어넣어 원주민 자치법원을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법원을 감독하는 '정의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했다.

 

Reuters Graphics

 

새 헌법이 넉 달 뒤 국민투표에서 통과될까. 1800만 인구 가운데 90% 가까이가 유럽계 등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이고, 가톨릭 60%에 개신교 18%를 포함하면 인구 다수가 기독교도다. 격차가 심한 만큼 상층부 엘리트들이 많은 걸 틀어쥐고 있다. 제헌의회가 헌법안을 만드는 동안에도 현실정치는 굴러간다. ‘경제 자유주의’를 내건 우파 정당 ‘칠레 바모스’가 상원 과반과 하원 3분의1을 장악하고 있으며 거기에 국가쇄신당(RN)이 힘을 보태고 있다. 주 정부들을 많이 차지한 중도좌파 ‘새로운 사회계약(NPS)’과 사회당, 존엄당(AD), 기독민주당 등이 우파에 맞서고 있지만 새 헌법에 대한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공격은 거세다.

 

근본적인 장애물은 우파들의 공격이 아닌지도 모른다. 좌파 국제언론 프레센사는 “군정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실패로 판명났으며 사회의 대다수는 성장과 복지로 경제적, 사회적 병폐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서 개헌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성장과 복지 어느 쪽도 아닌 ‘새로운 모델’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Pressenza] The new constitution is full democracy

 

코로나19 이전 칠레의 1인당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2만5000달러로 남미에서 안정된 경제에 재정건전성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정부 재정의 20%를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현실을 단시간 내 바꿀 수는 없다. 2003년부터 10년 동안 매년 5%씩 성장하던 칠레 경제가 그 뒤에 주춤했던 것은 구리값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구리값이 비쌀 때 쌓아둔 흑자로 235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굴리고 있고 개혁에 투입할 돈이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소외된 개개인이 아닌 ‘국가’를 기준으로 본다면 칠레야말로 자유무역의 수혜국 중 하나다. 칠레는 2004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시작으로 유럽연합, 메르코수르, 중국, 인도, 멕시코 등 60여개국과 협정을 맺고 있다. ‘새로운 모델’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자원 중심의 경제구조를 바꾸고 자연과의 공존 속에서 길을 찾자고 말하지만 구리와 목재와 물고기와 와인을 수출해 돈 버는 경제 구조를 바꾸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The Escondida mine, the largest in the world. /Mercopress

 

불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몇 년 간의 시위를 통해 확실하게 표출됐다. 그러나 광물을 판 돈으로 격차를 줄이고, 교육과 의료를 개선하고, GDP의 0.35%에 불과한 과학기술 투자를 늘려 제조업을 키우고, 원주민 자치를 늘리고, 환경을 좀 더 지키고, 젠더 다양성과 인권 수준을 높이는 일들을 ‘점진적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 많을 수 있다. 초안이 공개되기 전인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카뎀의 조사에서 유권자 46%가 헌법안에 반대할 것이라고 답했다. 석달 새 13%포인트나 올라간 수치였다. 반면 지지율은 56%에서 40%로 낮아졌다. 악티바 여론조사에서도 '거부'가 '지지'보다 근소하게 높았다. 로이터 등의 분석에 따르면 재산권에 대한 걱정, 연기금제도의 변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BNamericas] At a glance: Chile's constitutional convention and the energy sector

 

여전히 국부의 근원이 광물이라는 현실은 제헌의회 논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광물개발 독점권과 관련된 조항들을 놓고 제헌의회 내부 회의에서는 몇 차례나 충돌이 빚어졌으며 결국 헌법 초안은 ‘재생가능 에너지로 간다’는 전제 하에서 기존 정책목표에 몇 가지를 덧붙이는 정도에 그쳤다. 

 

Chile: Government spending as percent of GDP. theglobaleconomy.com
Chile: Fiscal balance, percent of GDP. theglobaleconomy.com

 

남녀 동수에 원주민 의석을 보장한 제헌의회가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피노체트의 유산을 헐어버리기로 작정한 것만으로도 칠레인들은 엄청난 정치적 의지와 역량을 보여줬다. 인구의 10% 가까이를 차지하는 최대 원주민 부족 마푸체는 "헌법안이 부결되든 승인되든 원주민들은 이미 이겼다"고 말한다. 필리핀을 비롯해 곳곳에서 ‘독재의 그림자’가 다시 세상을 덮는 듯한 이 때에, 칠레는 과거의 족쇄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새 헌법을 향한 열기는 점점 사그라지고 있으며 '최연소 대통령' 보리치에게는 헌법 국민투표가 가장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1 2 3 4 5 6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