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일대에 집결시킨 병력을 철수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 우크라이나 긴장은 해소되는 것일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5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크렘린에서 회담한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면서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러시아군이 일부 철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보다 몇시간 앞서 이미 러시아군 고위 지휘관들이 일부 병력이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에서 탱크와 전투차량, 자주포 부대 등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공개했다.
푸틴은"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러시아의 안전보장 요구에 대해 미국이나 나토와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안전보장 요구란, 나토의 확대를 멈추고 동유럽 즉 폴란드 등에 배치된 나토군과 장비를 철수시키라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의 다음 행보는 미국과 NATO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했다.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파트너들과 합의하려고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러시아는 논의가 끝없이 늘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90년 옛소련이 무너진 뒤 나토는 군사동맹을 확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약속과 달리 동쪽 회원국들을 계속 늘렸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나토와 협력할 방안을 찾는 것에 집중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푸틴 집권 뒤 미-러 관계가 계속 악화됐고, 특히 크림반도 병합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는 1990년 7월 주권선언에 중립국 지위를 명시했으나 크림반도 사태 이후 반러시아 성향이 더 강해졌고, 2019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유럽연합(EU)과 나토 가입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아예 헌법에 포함시켜버렸다. 나토가 목전까지 밀고 들어온다는 러시아의 경계심은 배가됐다.
[스푸트니크] Russia: If NATO Refuses to Publicly Reject Ukraine as Member, Kiev Should Declare Itself Non-Aligned
그래서 러시아는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명시해줄 것을 요구해왔다. 숄츠와의 회담에서 푸틴은 “우리는 30년 동안 나토가 러시아 국경을 향해 한 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나토 시설이 우리 문턱에 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은 나토 회원국 확대는 러시아와 협상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다만 나토와 러시아 관계의 투명성을 높이는 장치를 만들고 군비를 통제하고 군사훈련도 제한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숄츠 총리는 “외교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푸틴이 유럽의 입장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고, 러시아군이 실제로 철수했는지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MSNBC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말한 게 있는가 하면 러시아가 하고 있는 행동이 있다. 러시아군이 철수하는 것을 우린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블링컨은 러시아군 핵심 부대들이 접경지역을 떠나는 게 아니라 접경지역을 향해 이동하는 모습이 계속 포착됐다고 주장했다. 미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최근 며칠간 러시아군 7000명이 추가로 국경으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로이터] Images show Russian military activity near Ukraine still high - satellite firm
우크라이나 국경에 러시아군이 오히려 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러시아를 극도로 경계하는 에스토니아의 정보당국은 10여개 전투부대가 우크라이나 접경으로 가고 있고으며 16일 현재 접경지대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17만명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영국 국방정보국장도 드물게 공개 논평을 통해 장갑차, 헬기, 야전병원이 추가로 포착됐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러시아가 철수를 시작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스크바타임스] Russia's Troop Withdrawal Met With Skepticism in the West
러시아군 훈련도 계속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러시아 남서부뿐 아니라 전방위에서 훈련이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 해군 함정 30여척이 흑해에서 실탄 사격훈련을 하고 있고, 시리아의 흐메이밈 기지에도 최신형 Kh-47M2 킨잘 미사일로 무장한 러시아군 전투기가 배치됐다. 북쪽에서는 함대 20척이 바렌츠 해에서 훈련 중이다. 정상들의 외교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은행과 정부 웹사이트가 사이버공격을 받는 일도 벌어졌다. 배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와 미국은 러시아를 의심한다.
바이든은 백악관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국경에서 후퇴해 기지로 복귀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우리 분석가들은 여전히 그들이 위협적인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지난주 "러시아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위기감이 낮아진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유럽은 어쨌든 전쟁은 피할 수 있게 된 것 아니냐며 조심스럽게 낙관하는 분위기다.
[WP] Biden says U.S. has not verified a pullback of Russian troops from Ukraine’s border, despite Moscow’s claims
연설에서 바이든은 러시아가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이 외교적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바이든은 지난주 푸틴과 전화 회담을 한 뒤 “그가 원한다면 러시아, 미국, 유럽국들이 안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위급 외교를 계속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15일에는 블링컨 국무장관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전화 통화를 했고 같은 날 바이든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외교 해법을 논의했다.
위기 대응에 한창이던 나토는 위성사진을 근거로, 러시아가 의미 있는 규모로 철군하지는 않은 것으로 분석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브뤼셀에서 이틀간 열린 나토 회원국 국방장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현재까지 러시아가 지상군 병력과 장비를 철수시켰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나토는 이미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응해 폴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4개국에 부대를 배치했다. 스톨텐베르크는 회원국 국방장관들이 이번 회의에서 동쪽 경계선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는 계획을 만들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루마니아에 프랑스가 주도하는 전투부대를 배치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외교적 해결을 강조한 바이든도 16일 숄츠와 통화하면서 러시아의 공격 가능성이 남아있는 만큼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폴리티코] NATO boss Stoltenberg says Russian threat is ‘new normal’
세계가 푸틴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휘둘리는 느낌이다. 외교적 해법 쪽으로 이동해 간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세계는 불안감 속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어디까지 대치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러시아의 위협을 유럽의 ‘뉴노멀’이라고 표현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에서 벨라루스까지 높은 수준의 역량을 갖추고 공격준비를 마친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지금 보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이 뉴노멀이 된 것은 유감스런 일이지만 나토 회원국들도 이제 거기에 적응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뒤 러시아와 미국 관계는 ‘신냉전’이라는 말로 표현돼왔는데 그것이 이제는 군사적 대치에 이르렀다. 크렘린의 위협전술에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미국과 미국 주도의 동맹체제가 안전보장이 못 되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푸틴은 시리아 내전 때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를 지원했다. 대규모 파병도 아니고 돈을 쏟아붓지도 않았지만 아사드 정권을 지탱해줌으로써 '독재자이든 우리 편이면 확실히 보호해준다'는 메시지를 세계의 권위주의 정권들에 보냈다.
반면 미국은 늘 인권과 인도적 개입을 외치면서도 자국민을 학살한 시리아 정권을 방치했고 아사드 정권은 되살아났다. 게다가 지난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다소 무책임하고 혼란스런 방식으로 철군했다. 그 때 대만과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가 불안감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들이 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위기가 벌어졌다.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키신저연구소의 로버트 댈리 소장은 최근 CNBC 인터뷰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의지를 갖고 있는지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동맹국들을 확고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과거와 달라진 미국의 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바이든 정부가 러시아, 중국과 대립 일변도로 향하자 유럽은 발 맞춰주는 시늉을 하면서도 마크롱이나 숄츠의 크렘린 방문처럼 외교적인 트랙을 스스로들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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