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 섬나라 바베이도스에서 영국 깃발이 내려졌다. 영국 국왕이 국가원수인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1월 30일 바베이도스 수도 브리지타운의 국가영웅광장에서 산드라 메이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박수갈채와 함께 21발의 축포가 울렸다. 지난해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미아 모틀리 총리는 이날 기념식에서 “식민지의 과거를 뒤로 하고 완전히 떠날 때”라 했고 시인 윈스턴 패럴은 “유니온잭은 내려놓고 바얀의 깃발을 들자”고 했다. 바얀(Bajan)은 현지인들의 언어를 가리키는 이름이자 바베이도스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 중 하나는 바베이도스 출신 가수 리하나였다. 리하나는 아프리카-아일랜드계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후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콜과 마약에 찌든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한 어린 시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스타가 됐고, 지금은 사업가로 더 유명하다. 메이슨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바베이도스 공화국이 첫 항해를 시작했다”며 “복잡하고 불안정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큰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리하나를 ‘국민영웅’으로 선언했다. 주는 것 없는 영국 왕실과 식민주의의 유산 대신에 리하나가 보여준 성장과 성공의 스토리가 ‘바얀’들의 꿈임을 시사하는 듯했다.
이로써 1992년 모리셔스 이래 근 30년만에 영연방 국가 가운데 또 하나가 여왕을 국가원수에서 밀어낸 것이 됐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도 날아와 영국기가 내려가고 공화국의 새로운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봤다. “공화국의 창설은 새로운 시작”이라며 “역사를 물들인 끔찍한 노예제의 만행 같은 과거의 어두운 날들 속에서도 이 섬 사람들은 강인하게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나갔다”고 그는 말했다.
찰스 왕세자는 50여년 전 바베이도스가 독립할 때 축하하러 왔던 인연을 강조하면서 “바베이도스의 영원한 벗”이라고 했다. 하지만 400년에 걸친 과거사에 대한 언급은 ‘공식 사과’가 아니었고, 시민들은 시큰둥했던 모양이다. 시민운동가들은 “노예제의 최대 수혜자가 왕실이었는데 ‘여왕의 아들’이 독립 기념식에 온다는 것은 모욕”이라며 항의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찰스의 참석에 맞서 시위가 벌어질 판이었으나 당국이 코로나19 확산 걱정을 들며 막았다.
지난해 미국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살해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브리지타운에도 주민들이 모여서 연대를 표시했고, 노예무역을 옹호했던 영국 장군 호레이쇼 넬슨의 동상이 광장에서 철거됐다. 최근 현지 여론조사에서 영국 여왕을 존경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영국 왕실 가족 이름도 잘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직 하나 인기있는 사람은 왕실과 관계를 거의 끊고 캐나다로 이주해간 찰스의 둘째 아들 해리 왕자였다.
바베이도스는 면적 439 km2에 인구는 30만명이 채 못 된다. 카리브해 원주민 칼리나고 등이 살던 곳에 15세기 스페인 선박들이 오더니 카스티야 공국령으로 선포했다. 포르투갈도 한때 이 섬을 집적거렸으나 밀려났고 1625년 영국이 발을 디뎠다. 영국 식민지가 돼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들어섰고 흑인 노예들이 농장들을 채웠다.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1833년의 일이다. 섬 주민 90%는 ‘아프로-바얀’ 즉 아프리카계이고 나머지는 ‘앵글로-바얀’이라 불리는 유럽계와 인도 출신 등 아시아계다.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를 잇는 ‘대서양 삼각 노예무역’과 식민주의의 유산이 인구구조로 남은 셈이다. 1인당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약 1만3000달러로 중미에서는 높은 편이다. 아직도 사탕수수를 키우고는 있지만 제조업과 관광산업도 꽤 활발하다. 관광객 3분의1이 영국인이기는 하지만.
(잠시 샛길로 …바베이도스는 세계 최초로 ‘메타버스 대사관’을 만들고 있다. 디센트라랜드와 이미 계약을 했고, 솜니움스페이스나 수퍼월드 같은 다른 메타버스 플랫폼들과도 논의를 하고 있다. 그 플랫폼의 가상세계 안에서 바베이도스의 ‘주권’ 즉 독점권을 인정하는 것. 디지털 영토주권을 선언한 최초의 국가라고 테크전문지들은 소개한다. 물리적 공간은 없지만 명실상부한 대사관이므로 비엔나조약 등 국제관계 관련 조약에 부합하도록 법률적인 문제도 검토중이라고.
바베이도스가 대사관을 두고 있는 나라는 세계 18개국밖에 안 되지만 메타버스를 활용하면 세계 190여개 나라로 대사관을 늘릴 수 있다고 정부는 설명한다. 작은 섬나라이다보니 오히려 기술에 민감하고, 암호화폐에도 아주 우호적이며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도 개발 중이라고.)
1966년 독립을 한 뒤에도 바베이도스의 명목상 국가원수는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이었다. 브리지타운에서 왕실 깃발이 내려가기까지 독립 이후로도 55년이 걸린 것이다. 올해 72세의 공화국 첫 대통령 메이슨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판사 출신 정치인이다. 그의 경력은 온통 ‘최초’로 수식돼 있다. 바베이도스 첫 여성 변호사, 첫 여성 대법관, 영연방 중재재판소의 바베이도스 출신 첫 사무총장. 대통령이 되기 전 그의 직함은 ‘총독’이었다. 총독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아 이름 앞에 ‘데임Dame’이 붙었다. 마지막 총독이자 첫 대통령인 메이슨이라는 인물 자체가 ‘리틀 잉글랜드’라 불렸던 바베이도스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같기도 하다.
1970년대 세계에서 반식민주의와 함께 ‘블랙파워’ 즉 흑인들의 자각이 커졌고 1970년 가이아나, 1976년 트리니다드토바고, 1978년 도미니카 등이 잇달아 공화국으로 변신했다. 엘리자베스2세 재위 기간 국가원수 자리에서 여왕을 밀어낸 나라가 17개국에 이른다. 54개 영연방 국가들 가운데 군주국으로 남은 곳은 이제 영국을 포함해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15개국으로 줄었다. 브리지타운에 축포가 울릴 때 멀잖은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는 “바베이도스를 따라갈 때가 됐다”며 주민들이 거리로 나왔다고 로이터 등은 전했다. 다만 중도좌파 노동당이 집권한 바베이도스와 달리 자메이카에서는 친영국 성향의 우파가 강해 당장 공화국으로 바뀌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호주는 1999년 국민투표에서 절반이 조금 넘는 55%가 여왕 체제를 유지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2008년 케빈 러드 당시 총리가 공화국으로 가겠다고 선언한 뒤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변화는 없다. 캐나다의 경우 군주제를 폐지하려면 헌법을 개정하는 것 외에도 10개 주와 3개 준주(準州)의 비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과정에 발을 들이려는 정치인들이 거의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끄는 것은 영국이다. “바베이도스 만세! 다음은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제목으로 뽑은 어느 영국인의 반응이다. 왕실의 인기는 찰스 왕세자가 재혼할 때에 곤두박질쳤다가 그 아들 윌리엄 왕자가 결혼할 때 다시 올라갔다. 왕실 이벤트에 군주제의 미래가 달린 꼴이다. 지난 5월 유고브 여론조사에서 군주제 지지는 61%로 떨어졌지만 아예 없애자는 사람은 4명 중 1명뿐이었다. 하지만 청년층에서는 왕실 지지 41%에 군주제 폐지 31%로 수치가 바뀐다. 왕실 지지자들은 95세 여왕의 장수를 계속 기원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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