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수상한 GPS

[구정은의 '수상한 GPS']'동성결혼법' 지지한 프란치스코 교황

딸기21 2020. 10. 22. 16:19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주례 강론을 마친 뒤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

 

“동성애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침내 가톨릭의 ‘금기’를 넘어섰다. 동성 커플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시민결합(civil union)법’을 명시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가톨릭뉴스서비스(CNS) 등에 따르면 교황은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봉된 영화 ‘프란치스코’에서 “동성애자들도 가족 안에서 권리를 갖고 있다”며 시민결합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국 감독 이브게니 아피네예브스키가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교황 재임 7년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에서 교황은 “결혼은 남성과 여성의 일”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강조하면서도 유럽과 미국 일부 주들이 채택한 시민결합법을 명시적으로 지지했다. 동성 커플을 합법화하는 걸 인정했을 뿐 아니라 “시민결합법을 만들어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워싱턴포스트, AP 등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 커플을 위한 시민결합법을 촉구했다”, “시민결합법을 공개 지지한 역대 첫 교황”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성소수자 차별에는 강하게 반대해온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매우 긍정적인 움직임”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동성 간의 혼인생활을 가리키는 ‘시민결합’은 198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용어다. 1995년 중미의 코스타리카가 동성 결혼을 인정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 중남미 등 세계 전역에서 동성 간의 결합에도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혼’의 한 형태로 합법화한 나라나 지역도 있고, 시민결합이나 ‘시민파트너쉽’ ‘파트너쉽 가정’처럼 구분되는 법률 용어를 사용하는 나라들도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법제화되지 않았으나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오사카와 구마모토, 대만의 타이베이와 카오슝 등 지자체들이 개별적으로 동성 결합을 인정하는 추세다.

 

21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프란치스코>의 포스터.

 

이런 추세에 앞장 서서 반기를 든 것이 가톨릭이었다.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옹호하고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은 가톨릭의 오랜 가치관이었으며 특히 전임 교황 베네딕토16세는 낙태나 동성애, 안락사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서 가장 보수적인 목소리를 고집했다. 동성애자들은 “정신적인 악을 타고난 것”이라는 말까지 했다.

 

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족제도 ‘밖에’ 놓여야 하는 미혼모나 성소수자들에게도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밝혔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 시절 미혼모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거부한 사제들을 “현대의 위선자들”이라 비판한 적도 있고, 교황이 된 뒤에도 동성애자들을 존중하고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위 직후인 2013년 7월 교황은 브라질 순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기자들과 만나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하느님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는가”라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해 말 미국 최대 성소수자 잡지 ‘애드버케이트’는 그 해의 인물로 교황을 선정하고 이 발언과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2014년 이탈리아 언론 코리에레델라세라 인터뷰에서는 동성 커플에게도 의료 문제나 재산 문제 등에서 법적인 보호가 필요하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결혼은 남녀간의 일”이라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다양한 형태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해 10월 바티칸에서 열린 가톨릭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는 최고위급 성직자들이 모여 결혼과 이혼, 피임과 낙태, 동성애 등 가톨릭이 금기시해온 문제들을 공론에 부쳤다.

 

2013년 미국 최대 성소수자 잡지 ‘애드버케이트’에 표지모델로 등장한 프란치스코 교황. 애드버케이트

 

그럼에도 교황이 동성 결혼을 명확히 지지한 적은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2000년대 들어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지역이 생기자 2010년 교황은 한 수녀원에 보낸 서한에서 “가족을 심각하게 해치는 상황”이라고 언급하며 반대했다. 2017년 책으로 발간된 프랑스 사회학자 도미니크 울턴과의 대담에서 “‘결혼’은 남녀 간의 일이고 역사적인 용어이므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으니, 그것은 시민결합이라 부르자”고 말한 것이 가장 진전된 언급이었다.

 

교황의 이번 발언 역시, 기존 가족제도의 틀을 흔들기보다는 법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는 혼인 형태나 제도에서 배제된 약자들을 지키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에 가깝다. 교황청 회칙이나 공식 문서로 제시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교황의 이번 발언이 미치는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당장 가톨릭 안에서도 여론은 갈리고 있다. 교황의 이번 발언 뒤 저명한 예수회 사제 제임스 마틴은 트위터에 “교황이 동성 간 시민결합을 지지한 것은 교회가 LGBTQ(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반면 교계 보수파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의 토머스 토빈 주교는 곧바로 “교황의 입장은 동성 결합에 대한 교회의 오랜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성명을 냈다.

 

2003년 바티칸은 ‘신앙 교리에 관한 회칙’에서 “동성 결합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흐름에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했다. 교황청이 과거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뒤집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교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방적인 발언들을 ‘이단시’하는 흐름이 있으며, 그들의 반발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가디언은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