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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모랄레스 축출 1년, 볼리비아 대선은

딸기21 2020. 10. 2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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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 라파스 동쪽 산지 마을 코호니에서 18일(현지시간) 주민들이 대선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로이터


18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대선이 실시됐다.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60)가 사실상의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뒤 1년만에 치러진 선거다. 고산지대의 수풀을 헤치고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향하는 동안, 대도시 라파스 등지에는 군인들이 배치됐다. 좌우 극심한 대립과 정치적 양극화 속에 치러진 이번 선거 결과에 따라 볼리비아의 미래는 물론이고 남미 전체의 정세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초 3월에 치르려던 대선은 코로나19로 연기됐고, 5월에 하려다가 한 차례 더 미뤄져 이날 실시됐다. 현재 지지율이 가장 높은 인물은 모랄레스 정부에서 경제·재정장관을 지낸 사회주의운동(MAS-IPSP)의 루이스 아르세(57)다. 경쟁자는 우파인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67)과 가톨릭 극우파 루이스 카마초(41) 등이다. 우파 성향 임시대통령 자니네 아녜스(53)는 출마를 했다가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지난달 사퇴했다.

아르세가 승리하면 우파들과 군부의 좌파정권 축출 시도를 뒤집고 다시 MAS 정부가 출범해 모랄레스의 정책들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런데 선거 전날인 17일 갑자기 최고선거재판소가 “모든 표가 집계된 뒤에 결과만 공개하겠다”며 중간 개표 상황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아녜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최고선거재판소장을 우파로 교체했다. 아르세 측은 크게 반발했으며, 혼란 끝에 투표종료 3시간 뒤부터 개표 상황이 공개되기 시작했다고 텔레수르는 보도했다. 하지만 언제 결과가 발표될 지는 알 수 없다. 빠르면 하루이틀, 길어지면 일주일 뒤에 나올 수도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볼리비아 좌파 정당 사회주의운동(MAS) 대선후보 루이스 아르세가 18일 라파스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를 들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AFP

여론조사와 초반 개표 상황을 보면 아르세가 우세하다. 9월 말~10월 여론조사에서 아르세는 32~42%의 지지율로 줄곧 2위 메사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하지만 결선에 가지 않고 1라운드로 끝내려면 1위 후보가 50% 이상 득표하거나, 40% 이상 득표에 2위 후보와의 득표차를 10%포인트 이상 벌려야 한다. 결선에 가면 작년 대선에서 모랄레스와 맞붙었던 시민공동체당(CC)의 메사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두 후보만 놓고 여론을 물었을 때에는 메사가 10%포인트 이상 앞섰다.

우파 임시정부는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라며 라파스 등지에 1만여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아르투로 무리요 내무장관은 “독재자의 귀환”을 막겠다며 무장차량을 타고 군인들과 라파스 시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원주민들과 좌파 지지자들을 겨냥한 경고성 무력시위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번 대선은 볼리비아의 민심이 모랄레스와 좌파 정부를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외신들은 평했다. 특히 모랄레스를 축출한 우파 임시정부가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하고 실업률이 치솟은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MAS는 가난한 사람들의 정당”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힘을 갖고 있다고 뉴욕타임스 등은 전했다.

지난해 대선 뒤 축출돼 아르헨티나에 망명 중인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차려진 투표소에서 부재자 투표를 하고 있다.  EPA

투표용지에 모랄레스의 이름은 없지만, 그의 부재 속에 치러진 이번 대선은 모랄레스와 MAS 정권의 공과에 대한 국민투표 성격으로 치러지고 있다. 가스산업 국유화와 공공부문의 확대, 코카 재배 합법화 등 모랄레스가 집권 기간 펼친 ‘에보노믹스(Evonomics)’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적지 않다. 물론 2000년대 에너지값 거품 때 천연가스를 팔아 번 돈에 기대어 성장률을 끌어올렸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2014년 최대치였던 외환보유고는 그 뒤 계속 줄고 있고, 모랄레스 시절 한때 6%를 웃돌았던 성장률도 지난해 2.2%로 급격히 꺾여 2001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이 사실이다.

주산업이 농업이고 천연가스 수출에 수입을 의존하는 볼리비아는 특히 올해 코로나19로 경제적인 타격을 입었다. 가스와 대두 수출이 줄어든 탓이다. 앞서 브랑코 마린코비치 경제장관은 올해 성장률을 -4%로 예상했으나 세계은행은 -6%로 봤다. 로이터는 올들어 7월까지만 -7.9%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공식 실업률은 11.8%인데 실제 상황은 더 나쁠 것으로 보인다.

13년간 집권한 모랄레스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연임제한을 없애려 시도했고 지난해 대선에서 4연임에 도전했다. 그러나 부정선거 시비로 반발이 커지자 “선거과정을 조사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 사이 군부가 나섰고 모랄레스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군부와 우파는 모랄레스 축출을 ‘민주주의 세우는 과정’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모랄레스와 지지자들은 군부 쿠데타라 비난하고 있다.

이번 선거 기간 아르세는 일단 모랄레스와 거리를 뒀다. 최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는 만일 모랄레스가 귀국한다면 여러 혐의들로 기소될 수 있고, 사법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랄레스의 후계자’라는 딱지를 떼지는 못했다. 모랄레스는 아르세가 이기면 귀국하겠다고 이미 밝혔고, 선거재판소에서 불허해 좌절되긴 했지만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원 선거에 출마신청서를 내 정계 복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빈민·농민들의 지지 못잖게 장기집권으로 반발도 사고 있는 모랄레스가 돌아온다면 볼리비아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할 게 뻔하다.

MAS가 재집권하면 남미 전체 정세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멕시코에서는 2018년 말 중도좌파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취임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수감 중이던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풀려났다. 이어 아르헨티나에서 좌파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부가 출범했다. 미국의 온갖 전복 시도 속에서도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아직 건재하다.

MAS의 지지율은 2010년대 들어 퇴조하는 듯했던 남미 좌파 정치 ‘마레아 로사(분홍 물결)’가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좌파 장기집권에 싫증난 남미 여러 나라 유권자들이 우파를 선택했지만, 우파 정부들은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에 급급하다가 재선에 실패한 게 그런 예다.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과 아마존 환경파괴 등으로 ‘우파의 실패’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볼리비아 대선에 출마한 우파 후보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이 18일 라파스의 투표소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

반면 볼리비아 대선 결선에서 메사가 집권하면 먼저 에보노믹스를 뒤집으려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매장량이 3000억㎥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가스 산업에 외국자본이 대거 들어가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구가톨릭대 임수진 교수는 “메사는 집권하면 국영 에너지회사 YPFB를 민영화하겠다고 했고, 외국자본의 투자 규제도 완화한다고 했다”며 모랄레스 정부가 장기간 추진해온 정책들이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그러나 우파 정부가 가스산업의 빗장을 열었다가는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메사는 2000년대 초반 부통령과 대통령을 지낼 때 천연가스 산업을 외국기업에 내주고 환경을 망치는 것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에 부딪친 경험이 이미 있다. 당시 ‘볼리비아 가스전쟁’이라 불리던 이 시위가 코카 재배 농민들과 원주민들의 사회적 항의와 겹치면서 모랄레스가 권력을 쥐었다. 모랄레스의 최대 전적은 천연가스 산업을 국유화, ‘국민의 자산’으로 만들고 그 수입으로 보건·교육 인프라를 확충한 것이었다. 이를 뒤집으려면 다시 국민적 저항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MAS가 패하고 부정선거 시비가 일면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모랄레스의 정치적 기반인 코차밤바 코카재배 농민 지도자 안드로니코 로드리게스는 MAS가 지면 자신들이 움직일 것이라고 이미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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