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이 가장 좋은 백신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세계식량계획(WFP)으로 결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 올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WFP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노벨위원회의 베리트 라이스-안데르센 위원장은 오슬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계의 빈국 사람들에게 식량을 전달해온 이 기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라이스-안데르센 위원장은 특히 코로나19라는 글로벌 전염병 비상 상황 속에 세계에서 굶주림의 희생자가 늘고 있는 상황임을 지적하면서 WFP가 인상적인 역량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식량이 혼란에 맞서는 최고의 백신”이라며 “WFP는 식량안보를 평화의 도구로 만드는 다자간 협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WFP는 “자랑스러운 순간”이라는 환영 성명을 냈다.
1961년 창설돼 59년의 역사를 가진 WFP는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주지사를 지낸 데이비드 비즐리 사무총장이 이끌고 있다. WFP는 연간 72억달러(2018년 기준)의 예산을 가지고 북한과 예멘을 비롯한 세계 80여개국 주민 약 1억명을 지원하고 있다.
유엔은 2015년부터 2030년까지의 목표를 담은 ‘지속가능 개발목표(SDGs)’의 두 번째 항목으로 ‘굶주림 없애기(Zero Hunger)’를 설정했다. 그러나 유엔은 세계에서 기본적인 영양공급조차 충분히 받지 못하는 사람이 6억9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 중 약 1억3500만명은 만성적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지난 4월 WFP는 이런 식량 극빈층이 코로나19 때문에 2배로 늘어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당시 WFP는 “이웃이 굶주리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책이 아니다”라며 전염병이 지정학적 불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후 WFP는 나이지리아, 남수단, 시리아, 예멘 등에서 식량지원을 늘렸으며 7월에는 북한을 비롯한 83개국을 올해의 지원 대상으로 발표했다.
올해 평화상 후보로는 모두 318명의 개인·기구가 추천됐다.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관계 정상화를 중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수단 독재정권을 끌어내린 시민혁명을 이끈 여성 운동가 알라아 살라흐, 러시아 민주화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가 택한 것은 가난한 이들의 끼니를 돕는 유엔 기구였다.
21세기 들어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유엔 기구는 유엔(200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2005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2007년), 화학무기금지조약기구(OPCW·2013년) 등이며 WFP가 5번째로 수상하게 됐다. 유럽연합(EU)이 2012년 수상한 것까지 포함하면 다자기구가 전반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올해로 101번째를 맞는 평화상이 WFP에 주어지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일방주의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코로나19 시대에 세계의 방역을 조율하는 세계보건기구(WHO)에 돈을 끊겠다고 선언하는 등 글로벌 이슈를 함께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계속 찬물을 끼얹었다. 이 때문에 노벨위원회가 의도적으로 WHO에 평화상을 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으나, 영예는 WFP에 돌아갔다.
라이스-안데르센 위원장은 “WFP는 유엔의 매우 중요한 기구”라면서 “유엔의 다자간 협력과 인권을 위한 활동은 몇몇 나라에 만연한 포퓰리즘이나 민족주의 정치와는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다자주의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국가 간 협력을 촉구하는 것이 올해 평화상 수상자 선정의 중요한 기준이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또 “WFP에 상을 준 것은 국제사회가 유엔 기구에 적절히 자금을 지원하고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요구 때문”이라며 트럼프 정부의 유엔 경시와 국제기구 탈퇴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평화상 수상자에게는 10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3억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해마다 12월 10일 스웨덴에서 열리던 노벨상 시상식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지만, 다른 부문과 달리 평화상은 예년처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그대로 진행된다. 다만 참석 인원은 1000명에서 100명으로 크게 줄인다고 노르웨이 NRK방송 등은 전했다. 축하연회도 취소됐다.
■2000년 이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명단
2019년 아비 아흐메드 알리(에티오피아)
2018년 드니 무퀘게(콩고민주공화국), 나디아 무라드(이라크)
2017년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2016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콜롬비아)
2015년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4년 말랄라 유사프자이(파키스탄), 카일라시 사티아르티(인도)
2013년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2012년 유럽연합(EU)
2011년 엘런 존슨-설리프, 리마 보위(이상 라이베리아), 타우왁쿨 카르만(예멘)
2010년 류샤오보(중국)
2009년 버락 오바마(미국)
2008년 마르티 아티사리(핀란드)
2007년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 앨 고어(미국)
2006년 그라민은행, 무하마드 유누스(방글라데시)
200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
2004년 왕가리 마타이(케냐)
2003년 시린 에바디(이란)
2002년 지미 카터(미국)
2001년 유엔, 코피 아난 사무총장
2000년 김대중(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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