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스캔들, 도쿄 올림픽, 앙골라 독재자의 딸, 크렘린의 이너서클, 예루살렘의 버스테러, 북한의 돈세탁. 미 재무부가 10여년 동안 추적한 총 2조 달러 규모의 수상한 돈 거래와 얽힌 인물·사건들이다.
미국 온라인매체 버즈피드는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가 취합한 세계 170여개국 ‘미심쩍은 금융거래’ 1만8000여건을 담은 파일 2100여개를 입수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파나마페이퍼스, 파라다이스페이퍼스 등을 폭로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함께 분석한 이 자료들에는 총 2조 달러에 이르는 세계의 수상한 금융거래 1만8000여건의 흐름이 망라돼 있다. 대부분은 2011~2017년 자료이지만 일부는 1999년 것도 있다.
버즈피드 등은 FinCEN에 제출된 ‘의심거래보고서(SAR)’들을 분석해 부패, 횡령·도용 의혹, 제재 회피, 사기 등의 범주로 추렸다. 이들 중에는 이미 기소됐거나 혐의가 공개된 사람·기관도 있고, 의혹만 제기됐던 것들도 있다.
리스트를 보면 각국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 백화점이나 다름없다. 말레이시아 나지브 라작 전 총리의 측근으로 10억달러 사기극을 벌인 뒤 도피한 조 로우, 콩고민주공화국 군벌로 내전을 일으키려 한 장-피에르 벰바,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 알루미늄 회사 루살의 올레그 데리파스카 회장, 앙골라 옛 독재자의 딸로 재산이 30억달러에 이른다는 이사벨 두스산투스, 뇌물 스캔들로 브라질을 떠들썩하게 했던 석유회사 오데브레트 등이다.
런던으로 돈을 빼돌렸다가 영국 법원에서 자산이 동결된 카자흐스탄 부동산 재벌 무크타르 아블랴조프, 나이지리아 전 부통령 부인으로 역시 거액을 횡령한 루카이야투 아부바카르, 정부와 결탁해 축재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군수업체 파라마운트 그룹의 이보르 이치코위츠 회장, 앤젤투자자를 자처하며 다단계 사기를 저질렀다가 중국서 수감 중인 쉬밍 등도 이름을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선대본부장이었던 폴 매너포트도 리스트에 포함됐다. 매너포트는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캠프를 총괄했으나 우크라이나 친러 정부, 러시아 정부·정보기관과의 유착설에 사퇴했다. 그는 2003~2017년 만들어진 총 33건의 보고서에 44개 은행 620건의 거래가 보고됐다. 총 거래금액은 1억1000만달러에 이른다. 일례로 2017년 JP모건체이스가 키프로스 등지의 유령회사들에 송금을 했는데, 그 중에는 우크라이나에서 2014년 쫓겨난 친러계 대통령을 도운 컨설팅회사가 포함돼 있었다. 매너포트는 우크라이나 친러 정권을 자문해주며 거액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2018년에는 사기와 탈세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재벌 드미트료 피르타슈는 미국에서 뇌물 제공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인물이다. 러시아·중앙아시아 에너지와 광물을 거래하며 돈을 번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정당들을 지원하며 매너포트와 거래관계를 맺었다. 그 역시 SAR에 이름이 올라갔다.
우크라이나의 또다른 재벌 이호르 콜로모이스키는 지난해 미국 의회의 트럼프 대통령 탄핵 추진 때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다. 미디어그룹을 소유한 콜로모이스키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아들 수사를 독촉했다’는 사실을 흘렸기 때문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친한 사이인 콜로모이스키는 부패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망쳤다가 지난해 젤렌스키가 취임하자 귀국했다. 미국에도 여러 곳에 부동산을 갖고 있고, 부패와 돈 세탁 혐의를 받고 있다. SAR에 따르면 도이체방크는 그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로 돈을 빼돌리게 도왔다.
러시아 로텐베르크 형제도 눈길을 끈다. 아르카디 로텐베르크, 보리스 로텐베르크 형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시절부터 함께 했던 이른바 ‘유도크라시(Judocracy·유도 친구들)’ 멤버들이다. 소치 올림픽 때 정부 계약을 대거 수주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병합한 뒤 미국은 러시아 인사들을 우르르 제재했고, 푸틴의 이너서클인 로텐베르크 형제도 제재 대상이 됐다. 미 재무부는 아르카디 로텐베르크가 아들 명의로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영국 은행들을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쿄 올림픽과 관련된 검은 돈의 흐름도 드러났다. 일본 올림픽유치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싱가포르 홍보회사 블랙타이딩스가 세네갈 출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측에 수십만 달러를 건넨 것으로 파악됐다. 아사히신문은 전체 맥락으로 보아, 2013년 올림픽 개최지 결정 직전에 블랙타이딩스가 유치위로부터 거액을 받은 뒤 그 중 일부를 IOC 위원의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도쿄 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둘러싼 부정 거래 의혹은 2016년부터 제기됐다. 하지만 일본올림픽위원회는 자체 조사 뒤 “유치위로서는 블랙타이딩스의 자금 이용을 알 수 없었다”고만 발표했다.
버즈피드 집계에 따르면 관련 인물의 국적은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순이다. 관련 기관들로 보면 영국, 미국,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키프로스, 홍콩,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러시아 등과 관련된 사례가 많았다.
특히 대형 은행들의 연루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거래 건수와 액수로는 도이체방크가 압도적이다. SAR에 기록된 것이 982건이며 총 금액은 1조3000억달러에 이른다. 자료에 따르면 도이체방크는 범죄조직과 테러범, 마약밀매범 등이 검은 돈을 세탁하도록 허용했다. 이란 ‘고객’들의 자금관리를 돕기 위해 암호를 내줬고, 심지어 경영진이 직원들에게 미 당국을 피해갈 방법을 개발하라 종용하기도 했다. 1999~2006년 이란·시리아 자금 110억달러의 이동을 도운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역시 제재 기간에도 미국 은행들을 통해 금융거래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JP모건체이스은행은 2011~2013년 북한과 관련된 총 9000만달러 규모의 거래를 FinCEN에 신고했다. JP모건과 뉴욕멜론은행 등을 통해 승인된 거래 규모가 1억7500만달러에 육박한다. 미 법무부가 북한 기업과 거래한 혐의로 기소한 중국 단둥훙샹실업발전과 이 회사 대표 마샤오훙을 통해 위장기업을 활용, 북한으로 자금이 들어갔다.
HSBC는 부패와 관련된 수백만 달러가 세계를 이동하게 도왔다. JP모건은 소유주를 확인하지 않고 런던 계좌에서 10억달러가 드나들게 허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 연방수사국(FBI)의 10대 현상수배범으로 러시아 마피아 ‘보스 중의 보스’라 불리던 세미온 모글리예비치의 돈이었다. 런던 바클레이즈는 푸틴 측근이 제재를 피해 서방 금융시스템을 이용하게 해줬다. UAE 중앙은행은 이란이 제재를 에둘러 자국 은행들을 이용하는 걸 방치했다. 스탠다드차터드는 2003년 예루살렘 버스 테러와 연관된 자금이 요르단의 아랍뱅크로 이전되게 했다.
공개된 파일들에 대해 도이체방크는 “다 끝난 거래”라고 했고, 몇몇 은행들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ICIJ는 “그동안 각국이 불법 금융거래를 차단한다며 은행들에 벌금을 물렸지만 소용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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