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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75살 유엔의 ‘스트리밍 총회’

딸기21 2020. 9. 22. 21:10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앞에 유엔 깃발과 미국 국기가 걸려 있다.  UPI

 

유엔 총회가 22일(현지시간) 본격 개막된다. 올해 총회에서는 2015~2030년 유엔의 목표인 ‘지속가능목표(SDG)’를 중간 점검하고 코로나19 시대의 방역·빈곤 대응과 기후변화, 핵 군축협상 갱신 등을 논의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올해는 ‘스트리밍 총회’로 치러지게 됐다. 그러나 전염병에 더해 미국 대선이라는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이번 총회는 ‘외교의 실종’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유엔 총회의 공식 개막은 지난 15일이었지만 정상들의 연설로 이뤄지는 일반토의와 함께 본격적으로 열린다고 볼 수 있다. 22일 오전부터 시작되는 올해의 일반토의는 예고됐던 대로 화상연설로 진행된다.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의 코로나19 확산이 워낙 심해 이미 몇 달 전부터 각국의 유엔본부 대표부들은 직원 체류를 최소화했고, 유엔본부 자체도 재택근무와 화상회의로 업무 형태를 바꿨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뉴욕이 봉쇄된 3월에 일찌감치 올해 총회를 화상회의로 열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해 같으면 유엔 총회장에는 회원국마다 좌석 6개가 배정된다. 하지만 올해는 ‘1국 1석’이다. 대통령·총리 등 각국의 대표 연설로 본회의 ‘참석’을 제한한 셈이다.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볼칸 보즈키르 유엔 총회 의장(터키)을 비롯한 극소수만 총회 현장에서 연설을 한다. 다른 정상·대표들은 각기 자국 국기 앞에 앉아 사전 녹화한 화상메시지로 현장 발언을 대체한다.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의 총회장에서 볼칸 보즈키르 의장 주재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이번 총회가 대부분 화상회의로 진행돼, 각국에서 온 대표단은 거의 없었다.  EPA

 

첫날의 연설자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등이다. 칠레·남아프리카공화국·쿠바 정상과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 문재인 대통령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오전에 연설이 잡혔다.

 

다음달 24일 75살 생일을 맞는 유엔은 이번 총회에 의미를 부여하며 세계의 100만명을 대상으로 ‘유엔과 함께 하는 희망의 메시지’ 캠페인을 벌였다. 보즈키르 총회 의장은 앞서 개막선언에서 각국의 협력을 명시한 유엔 헌장을 언급하며 “다자주의를 계속 실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반토의 개막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합의를 깨고 이란 제재 행정명령을 내림으로써 유엔의 모토인 ‘다자주의’는 시작부터 흔들렸다.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깬 미국을 향한 시선이 곱지는 않겠지만 중재자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작년에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미·이란 정상 만남을 이끌어내려 뉴욕의 호텔들을 분주히 오갔으나 이번에는 정상들은 물론 실무진들이 대면하는 자리조차 없기 때문이다.

 

사상 처음으로 유엔에서 ‘줌(Zoom) 외교’ ‘E-외교’가 시도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의미 있는 국제적 합의가 나오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30일의 생물다양성 정상회의, 10월 1일의 제4차 세계여성포럼 등 이번 회기의 고위급 대화들도 모두 화상회의로 대체됐다. 지난해 유엔 총회는 스웨덴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선도 속에 ‘기후위기 총회’로 치러졌으나 이번에는 연례 행사인 총회장 앞 시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유엔 총회 정상 연설을 하루 앞둔 21일(현지시간), 총회장 앞 로비는 보안요원만 지킬 뿐 한산한 모습이다.  로이터

 

협상을 돕는 ‘분위기’도, 비공식 대화도 없는 온라인 외교가 가능할지 회의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고 가디언은 보도했다. 아이슬란드의 한 유엔 외교관은 최근 줌 세미나에서 줌 외교의 문제점을 설명하면서 “모든 게 녹음된다는 것”을 들었다. 물밑 대화, 이면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각국 외교관들의 보안 불안감도 적잖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유엔에도 혁신 바람이 불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면 만남은 사라졌지만 싱크탱크와 학자들의 공개토론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외교관들끼리 못 만난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논의의 범위를 넓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디언은 주요20개국(G20) 총회 준비모임들이 화상회의로 대체된 것을 들며, 국제회의가 줄어든 것만으로도 항공요금과 탄소배출이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번 총회에서 유독 ‘외교’가 사라진 데에는 코로나 탓도 있지만 결국 미국 대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세계가 11월 이후를 기다리며 관망 중이기 때문이다. 미국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이란 전문가 카림 사자푸어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란은 자신들이 상대할 사람이 트럼프냐 조 바이든이냐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고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스는 “모임(assembly)이 빠진 총회(General Assembly)”라고 표현하면서 “난동꾼의 도발도 없고, 세계평화를 향한 열정적인 호소도 없고, 자국 유권자들을 겨냥한 연설들만 있는 총회”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